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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

대법(大法)은 창세주(創世主)의 지혜이다. 그는 천지개벽[開天闢地]ㆍ우주조화[造化宇宙]의 근본으로, 내포가 지극히 홍대하고 미세하며, 부동(不同)한 천체 층차(層次) 중에 부동한 펼쳐보임[展現]이 있다. 천체의 가장 미시적인 데에서 가장 미시적인 입자의 출현까지, 층층의 입자는 무량무계(無量無計)하며,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또 인류가 알고 있는 표층의 원자ㆍ분자ㆍ성체(星體)ㆍ성계(星系)에서 더욱 큰 것에 이르기까지, 부동한 크기의 입자가 부동한 크기의 생명과 우주 천체에 두루 퍼져 있는 부동한 크기의 세계를 조성(組成)했다. 부동한 층차의 입자 본체(本體) 상의 생명으로서 말하자면, 이 한 층 입자보다 큰 입자가 바로 그들 하늘 중의 별[星球]인바, 층층이 이러하다. 우주 각층의 생명으로서 말하자면 무궁무진하다. 대법은 또 시간ㆍ공간ㆍ수많은 종류의 생명 및 만사만물(萬事萬物)을 만들었으며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고 빠뜨리는 것이 없다. 이는 대법(大法) 真(쩐)ㆍ善(싼)ㆍ忍(런) 특성의 부동한 층차에서의 구체적인 체현(體現)이다.

인류의 우주ㆍ생명에 대한 탐색 방식이 아무리 발달했다 하더라도, 다만 저층 우주 중의 인류가 존재하는 공간 일부를 통찰[洞見]하고 있을 뿐이다. 사전(史前) 인류에게 출현한 여러 차례 문명 중에서 모두 다른 별[星球]을 탐색한 적이 있지만, 아무리 높이 아무리 멀리 날았다 하더라도 인류가 존재하는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류가 우주의 진실한 펼쳐보임[展現]을 진정으로 인식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인류가 우주ㆍ시공ㆍ인체의 수수께끼[迷]를 요해(了解)하려면 오직 정법(正法) 중에서 수련하여 정각(正覺)을 얻고 생명의 층차를 제고해야만 한다. 수련 중에서 또한 도덕 품성을 제고할 수 있고, 진정한 선과 악ㆍ좋고 나쁨을 분별해내며 인류의 층차를 벗어남과 동시에, 비로소 진실한 우주 및 부동한 층차, 부동한 공간의 생명을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다.

인류의 탐색은 기술 경쟁을 위한 것이고 구실은 생존 조건을 개변한다는 것인데, 많게는 신을 배척하고 인류의 도덕적 자아 단속을 방종하는 것에 기초를 두었다. 이런 이유로 과거 인류에게 출현했던 문명이 여러 차례 훼멸되었다. 탐색도 물질세계 내에 국한될 수 있을 뿐이고, 방식상에서는 한 가지 사물이 인식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연구한다. 그러나 인류 공간 중에서는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또 확실하게 인류의 현실 중으로 반영되어 올 수 있는 현상은, 정신(精神)ㆍ신앙(信仰)ㆍ신언(神言)ㆍ신적(神跡)을 포함하여, 신을 배척하는 작용하에 지금껏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만약 인류가 도덕을 기초로 사람의 품행과 관념을 제고할 수 있으면, 인류사회의 문명은 비로소 장구(長久)할 수 있고 신적(神跡)도 인류사회에 다시 출현할 것이다. 과거 인류사회 중에도 반신반인(半神半人) 문화가 여러 차례 출현해 인류로 하여금 생명과 우주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제고하게 했다. 인류가 세간에서의 대법의 표현에 대해 마땅히 있어야 할 경건과 존중을 체현할 수 있으면, 사람과 민족 혹은 국가에 행복 또는 영예를 가져다줄 것이다. 천체ㆍ우주ㆍ생명ㆍ만사만물은 우주 대법이 개창(開創)한 것인바, 생명이 그에 어긋나면 곧 진정한 패괴(敗壞)이고, 세인이 그에 부합할 수 있으면 진정 좋은 사람이며 동시에 선보(善報)와 수복[福壽]이 따를 것이다. 수련인으로서 그에 동화하면 당신은 바로 득도자(得道者) — 신(神)이다.

李洪志
2015년 5월 24일

 

부이유덕(富而有德)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돈이란 몸 밖의 물건이라고 하였다. 사람마다 다 알고 있으나 사람마다 구하고자 한다. 장성한 남자(壯者)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숙녀(仕女)는 영화(榮華)를 위해서, 노인은 노후를 위해서, 지자(智者)는 영예를 위해서, 공직자는 이것을 위해 직분을 다하는 등등, 이런 이유로 돈을 구한다.

심한 자는 이를 위해 다투고 싸우며 강자(強者)는 위험한 짓을 하며, 화를 잘 내는 자는 이를 위해 폭력을 행사할 수 있고, 질투하는 자는 이 때문에 죽는다. 백성을 잘살게 함은 군신의 도리(君臣之道)이나, 돈을 숭상함은 최하책(下下之擧)이다. 부유하지만 德(더)가 없다면 중생을 해칠 것이요, 부유하면서도 德(더)가 있음이 바로 중생이 바라는 바이니, 부유하다고 하여 德(더)를 펴지 않으면 안 된다.

德(더)는 전생에 쌓는 것이니, 군(君)ㆍ신(臣)ㆍ부(富)ㆍ귀(貴)는 모두 德(더)에서 생기며, 德(더)가 없으면 얻지 못하고 德(더)를 잃으면 모든 것이 흩어져 없어진다. 고로 권력을 도모하고 재물을 얻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德(더)를 쌓아야 하며, 고생을 겪고 선을 행해야만 많은 德(더)를 쌓을 수 있다. 이로써 인과관계를 알게 되고 이를 잘 알면 나라(政)와 백성(民)의 마음을 자연히 단속할 수 있어, 천하는 부유하고도 태평해질 수 있다.

李洪志
1995년 1월 27일

 

박대(博大)

法輪大法(파룬따파)의 법리는 종교 신앙을 포함한 그 어떤 사람의 수련에든 모두 지도 작용이 있다. 이것은 우주의 이치로서, 여태껏 말한 적이 없는 진정한 법이다. 과거에는 사람이 우주의 이치(佛法)를 아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불법은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체 속인사회의 학술이나 논리를 초월한 것이다. 과거 종교에서 전한 것과 사람들이 감수(感受)한 것은 다만 겉모양이고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박대정심(博大精深)한 내포는 오직 수련하는 사람이 부동(不同)한 층차 중에서 진정으로 수련해야(眞修)만 비로소 체험하고 깨닫고 나타낼 수 있으며, 비로소 법(法)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볼 수 있다.

李洪志
1995년 2월 6일

 

진수(眞修)

진수(眞修)제자여, 내가 당신에게 가르친 것은 수불수도(修佛修道)하는 법(法)이건만, 당신들은 속인 중의 이익이 손실됨으로 인해 오히려 나에게 괴롭다고 하소연할 뿐, 자신이 속인 중의 집착심을 내려놓지 못함에 대해서는 괴로워하지 않는데, 이것이 수련인가? 속인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이것은 초상적인 사람으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관이다. 진수제자는 사람마다 모두 넘어야 하는바, 이것이 수련자와 속인의 경계선이다.

사실 당신들이 속인 중의 명(名)ㆍ이(利)ㆍ정(情)에 해를 입어 괴로워한다면 아직 속인의 집착심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다. 당신들은 기억해야 한다! 수련 자체가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라, 속인의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당신들이 명(名)ㆍ이(利)ㆍ정(情)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될 때, 당신들은 비로소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당신들이 비할 바 없이 아름답고도 성결(聖潔)한 세계에서 떨어져 내려오게 된 것은, 당신들이 그 층차 중에서 집착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비교해 보면 가장 더러운 세계에 떨어지고서도 당신들은 재빨리 되돌아 수련하지 않고, 오히려 또 더러운 세계 속의 그런 더러운 것들을 붙안고 놓지 않으며, 심지어 조금만 손해를 보아도 고통스러워 어쩔 줄 모른다. 당신들은 아는가? 부처(佛)는 당신들을 제도하기 위해 일찍이 속인 중에서 동냥했고, 나는 오늘 또 큰문을 열고 대법(大法)을 전수하여 당신들을 제도하고 있다. 나는 무수한 괴로움을 겪었어도 고통스럽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당신들은 또 무슨 내려놓지 못할 것이 있는가? 당신이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천국으로 갖고 갈 수 있단 말인가?

李洪志
1995년 5월 22일

 

명지(明智)

내가 일부 수련생들에게 사상이 과격한 것은 일종 사상업(思想業)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알려주자, 지금 많은 수련생이 평소 자신에게 나타나는 그리 좋지 못한 일체 생각을 모두 사상업이라고 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당신 자신에게 어떤 좋지 못한 생각도 다 없다면, 당신은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그렇게 순결하다면 당신은 바로 부처 아닌가?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자신의 사상 중에서 더러운 생각이 격렬하게 반영되어 나와 스승을 욕하고, 대법(大法)을 욕하며, 사람을 욕하는 등등의, 내버리지도 억누르지도 못하는 이런 것이 바로 사상업력(思想業力)이다. 그러나 또 일부 약한 것도 있으나, 통상 정상적인 사상 염두와는 같지 않으므로 반드시 명확해야 한다.

李洪志
1995년 5월 23일

 

깨달음(悟)

인간 세상이 혼탁(渾渾)하여 옥석이 뒤섞였구나(珠目相混). 여래가 세상에 내려옴은 은밀하다. 법(法)을 전함에 필연 사문(邪門)의 교란이 있다. 도(道)와 마(魔)가 함께 전해져, 한 세상에 함께 있으니, 진짜와 가짜를 가려냄은 주로 깨달음에 달렸다. 어떻게 분별하는가, 필연 상사(上士)가 있다. 과연 맺은 연분대로 깨달을 수 있는 자들인지라, 잇따라 모여와 입도(入道)하여 법(法)을 얻는구나. 정(正)과 사(邪)를 가려내어 진경(眞經)을 얻고, 그 몸을 가볍게, 그 지혜를 풍부하게, 그 마음을 충실하게 하여 법선(法船)에 오르니 유유하구나. 옳도다! 원만을 이룰 때까지 정진하라.

혼세(混世)에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돈을 위해 살고 권세를 위해 죽는다. 파리 대가리만 한 작은 이익을 위해 기뻐하고 걱정하며 고달프게 다투니 일생토록 업(業)을 빚는구나. 이런 사람이 만약 이 법(法)을 들으면 필연 비웃으며 미신이란 두 글자를 뱉어내고, 마음속으로 이해하지 못해 믿기 어려워할 것이니, 이런 사람은 하사(下士)라 제도하기 어렵다. 업이 커서 이미 그 몸을 봉(封)하고, 그 지혜를 닫아버렸으니, 본성이 없구나.

李洪志
1995년 6월 14일

 

왜 볼 수 없는가(爲何不得見)

보이면 믿고 보이지 않으면 곧 믿지 않는 이것은 하사(下士)의 견해이다. 사람은 미혹 중에서 업을 너무 많이 빚어, 본성이 미혹되었으니 어찌 볼 수 있겠는가. 깨달음(悟)이 먼저이고 보는 것은 나중이라, 마음을 닦고 업을 제거하여 본성이 나와야만 비로소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사(上士)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깨달음에 의해 원만을 이룬다. 뭇사람 중에는 볼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으니 층차에 의해 정해진 것이며 근기(根基)에 의한 소치다. 많은 수련자가 보지 못하는 이유는 보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인데 이는 집착이라, 버리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많게는 업력에 의한 저애이거나, 환경이 적당치 않아서거나, 또는 수련하는 방법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원인은 여러 가지라, 사람에 따라 정해진다. 보이는 자는 보더라도 똑똑지 않을 수 있는바, 똑똑히 보이지 않아야 도를 깨달을 수 있다. 만약 자신이 그 어느 경지에 이른 듯 무엇이나 다 똑똑히 볼 수 있다면 이 사람은 개공(開功)한 것으로 더는 수련할 수 없으며 그 깨달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李洪志
1995년 6월 16일

 

법을 배우다(學法)

지식인이 대법(大法)을 배움에 주의해야 할 가장 두드러진 한 가지 문제는 바로 대법(大法)을 일반 속인 중에서 이론 저서를 학습하는 방법으로 배우는 것이다. 마치 알맞은 명인어록(名人語錄)을 선택해서 자신의 행동을 비춰보며 배우는 것과 같은데, 이는 수련자의 제고에 방해된다. 또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에 아주 깊은 내포가 있고, 부동한 층차의 수련을 지도하는 아주 높은 것이 그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서는 한 글자 한 글자씩 파고드는데,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장기적인 정치이론 학습 중에서 양성된 습관 역시 수련에 영향을 주는 일종의 요소로서, 법(法)을 곡해(曲解)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법(法)을 배울 때, 기어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으로 알맞은 부분만을 찾아서 학습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이 역시 일종의 변상(變相)적 집착(모순이 있어서 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포함하지 않음)이다. 대법(大法)을 잘 배우려고 한다면 어떠한 목적도 품지 말고 배워야만 비로소 옳은 것이다.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 읽을 때마다 좀 명백해졌다면 바로 제고한 것이며, 당신이 한 번 보고 나서 혹시 단 한 가지 문제라도 명백해졌다면, 그 역시 진정으로 제고한 것이다.

사실 당신은 수련 중에서 바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수련되어 올라온 것이다. 기억하라. 구함이 없어야만 스스로 얻게 된다.

李洪志
1995년 9월 9일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如何輔導)

각지의 많은 보도원(輔導員)은 대법(大法)에 대해 아주 높은 인식이 있어 솔선수범(以身作則)하여 연공장을 아주 잘 조직하였다. 그러나 잘하지 못한 보도원도 있는데 주로 업무처리 면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보도원 일의 편리를 위해 수련생으로 하여금 보도원에게 복종토록 연공장에서 명령식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법(法)을 배움은 자원(自願)해서다. 만약 배우는 자 자신이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으며 또한 모순이 나타날 수 있다. 만일 고치지 않으면 모순이 격화될 수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법(法) 배우는 것을 심하게 파괴할 수 있다.

더욱 심한 자는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복종하게 하려고 늘 일부 골목 소식을 전하거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을 전하여, 자신의 성망을 제고하거나 또는 남달리 독특하게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안 된다. 우리의 보도원은 사부가 아니고 자원해서 여러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마땅히 이런 집착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보도원 일을 잘할 것인가? 우선 자신을 수련생으로 두어 수련생 위에 있다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일할 때 모르는 것이 있으면 겸허하게 여러 사람과 함께 탐구하고 토론해야 한다. 일을 잘하지 못했으면 진심으로 수련생들에게 말해야 한다. “저도 여러분과 같은 수련자이기에 일을 하는 중 잘못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일은 제가 잘못했으니, 그럼 제의한 바에 따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일을 잘해 보겠다는 성의(誠意)가 있다면, 당신이 보라,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누구도 당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당신을 법(法)을 잘 배운 흉금이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대법(大法)이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모두 배우고 있다. 보도원의 일거일동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수련생은 모두 대법(大法)에 대조하여 가늠할 것이며 아주 똑똑히 보아낼 것이다. 자신을 높이려는 생각이 있기만 하면 수련생은 당신의 心性(씬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겸허(謙虛)해야 하며 그래야만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성망(聲望)은 법 학습을 잘함으로써 수립되는 것이다. 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잘못이 없을 수 있겠는가?

李洪志
1995년 9월 10일

 

궁(穹)

우주의 호한(浩瀚)함과 천체(天體)의 홍대(洪大)함은 사람으로서는 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물질의 미세(微)함도 사람으로서 엿보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인체의 심오함은 사람들이 그 표면만 배워서는 알 수 없는 아득한 일이라, 생명의 방대하고 복잡함은 인류의 영원한 수수께끼로다.

李洪志
1995년 9월 24일

 

경지(境界)

악자(惡者)는 질투심의 소치로 자신을 위하고, 화를 내며, 불공평하다고 한다. 선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어,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 각자(覺者)는 집착심이 없으며 세인들이 환각(幻)에 미혹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李洪志
1995년 9월 25일

 

무엇이 공인가(何爲空)

무엇을 공(空)이라 하는가, 물질이 빈 것이 아니라 집착 없음이 진정한 공이다. 하지만 선종(禪宗)은 이미 법(法)이 끝나 전할 것이 없다. 난법말세(亂法末世)에 어떤 학자는 텅 빈 그 이치만 고집스레 틀어쥐고서, 경박하기가 마치 철리(哲理)의 근본을 깨닫기라도 한 듯하다. 그 조상 달마(達摩)도 스스로 오직 육대지법(六代之法)이라 하며, 후로는 더 전할 수 없다고 했다.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예컨대, 모두 다 공(空)이라, 무법(無法)ㆍ무불(無佛)ㆍ무상(無像)ㆍ무아(無我)ㆍ무존(無存)이라니, 달마는 무슨 물건인가? 무법(無法)이라니, 선종의 텅 빈 이치는 무슨 물건인가? 만약 무불무상(無佛無像)이라면 석가모니는 어떠한 사람인가? 당신은 무명(無名)ㆍ무상(無像)ㆍ무아(無我)ㆍ무존(無存)이라 전부가 공(空)이라니, 밥을 먹고 물을 마셔 무엇을 할 것인가? 옷을 입어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눈을 파면 어떠할까? 당신은 어찌하여 그 속인의 칠정육욕에 그렇게도 집착하는가. 여래가 말하는 공(空)은, 실은 속인의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남은 마음 하나 없음이 공(空)의 참뜻이다. 우주는 본래 물질이 존재하고 형성되고 머무는 곳인데 어찌 빌 수 있겠는가. 여래가 아니면서 법(法)을 전하면 필연코 단명(短命)이라, 이치는 끝나고 존재하지 않나니, 나한(羅漢)의 법(法)은 불법이 아니로다! 깨달을지어다! 깨달을지어다!

李洪志
1995년 9월 28일

 

견정(堅定)

사부가 있으면 신심(信心)이 충만하고 사부가 없으면 수련할 흥미가 없어지니, 마치 사부를 위해 수련하고 흥미를 위해 오는 듯한데, 이는 중사(中士)의 한 가지 큰 폐단이다. 석가, 예수, 노자, 공자가 떠나간 지 이천 년이 넘었지만, 그 제자들은 여태껏 사부가 없어 수련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련이란 자기의 일로서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사부 된 사람은 단지 그 표면적인 법리(法理)만 알려줄 뿐이다. 마음을 닦아 욕망을 끊고 지혜를 밝혀 미혹되지 않음은 곧 자신의 책임이다. 흥미(興)로 오면 마음이 확고하지 않은바, 세속으로 들어감에 필연코 그 근본을 잊게 된다. 만약 그 생각(念)을 고수하지 아니하면 일생 얻음이 없을 것이다. 언제 다시 기연(機緣)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으니, 어렵도다!

李洪志
1995년 10월 6일

 

불교의 논술은 불법의 가장 약소한 일부분이다
(佛教的論述是佛法最弱小的一部份)

중생들이여! 불교로 眞(쩐)ㆍ善(싼)ㆍ忍(런) 대법(大法)을 가늠하지 말라. 그것으로는 가늠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습관적으로 불교의 경서(經書)를 법(法)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사실 천체(天體)는 너무나 커서 우주에 대한 부처의 인식을 벗어났다. 도가의 태극 역시 작은 층차(小層次)에서 우주를 이해함이라, 속인 이 한 층에 이르러서는 이미 실질적인 법(法)이 없게 되었다. 다만 우주 변두리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좀 수련할 수 있게 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속인은 가장 낮은 층차의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한 불법(佛法)을 알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부처를 공경하면 수련 기연(機緣)의 인과(因果)를 심을 수 있고, 수련하는 사람은 주문으로 고급생명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계율을 지키면 수련인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성인(聖人)의 말씀을 들었다. 역사상 어떤 사람들은 각자(覺者)가 한 말이 바로 불법인지 아닌지 줄곧 연구해 왔다. 여래부처가 한 말은 불성(佛性)의 체현이라, 법(法)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오히려 우주의 실질적인 법(法)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사람이 불법의 진실한 체현을 아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법이 무엇인가는 고층차로 수련되어야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한 수련의 본질을 더욱 알지 못하게 하였다. 法輪大法(파룬따파)는 우주의 특성[불법(佛法)]을 만고(萬古)이래 처음으로 사람에게 남겨놓은 것으로, 사람에게 하늘로 올라가는 한 부의 사다리를 남겨놓은 것과 같다. 그러니 당신이 어찌 과거 불교 중의 것으로 우주 대법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李洪志
1995년 10월 8일

 

무엇이 지혜인가(何爲智)

인류사회 중의 유명인사, 학자, 각 분야의 전문가를, 사람들은 아주 위대하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모두 아주 보잘것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속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식 역시 단지 속인사회의 현대과학이 인식한 그런 조그마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방대한 우주에서 가장 거시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미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인류사회는 가장 중간, 가장 외층, 가장 표면에 있다. 생명 역시 가장 낮은 존재형식이다. 그러므로 물질과 정신에 대한 인식 역시 아주 낮고 얕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련한 것이다. 전 인류의 지식을 다 장악했다 할지라도 역시 속인이다.

李洪志
1995년 10월 9일

 

일이 아니라 수련이다(不是工作是修煉)

보도소에 대한 나의 요구를 따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이다! 장래 법의 유전(流傳)형식에 관계된다. 왜 관료사회에서 장기적으로 양성한 습관을 내려놓지 못하는가? 보도소를 속인사회 중의 행정부서의 업무처리 방법과 태도로 대하여, 무슨 문서를 발행하고, 무슨 관철(貫徹)ㆍ집행(執行)을 한다든가, 무슨 인식제고라든가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대법(大法) 수련자는 오직 수련의 心性(씬씽)과 과위(果位) 층차를 제고할 뿐이다. 때로는 회의를 여는데, 역시 속인의 직장 식으로 한다. 예컨대 무슨 무슨 간부가 연설하고, 어느 어느 책임자가 총괄한다는 것이다. 지금 사회의 부패한 습성, 관료적 절차를 나라에서까지도 개혁하려 하는데,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말법시기 인류는 모든 면에서 다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수련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그런 식의 일 처리 방법을 내려놓지 못하는가? 우리는 절대로 사회의 행정기구나 기업 사업단체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또 일부 전에 퇴직한 사람들이 할 일 없이 지내다가 法輪大法(파룬따파)가 좋다고 생각하여 와서 일할 것을 제안했는데, 한가한 마음에 참기 힘든 공허감을 메우고자 함이었다. 당연히 안 된다! 法輪大法(파룬따파)는 수련이지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일체 협조인은 우선 心性(씬씽)이 높고 착실히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心性(씬씽)수련에서 앞선 협조인이어야 하며, 속인 식의 지도자는 필요치 않다.

李洪志
1995년 10월 12일

 

퇴직하여 다시 연마(退休再煉)

강의를 들었고 근기(根基) 또한 괜찮은 일부 수련생들이 사업에 바빠서 연마하지 않는데 몹시 애석하다! 만약 일반적인 속인이라면 나도 더 뭐라고 말하지 않으며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 하지만 이 부분 사람들은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인류의 도덕은 일일천리(一日千里)로 타락하고, 속인은 모두 그 물결에 따라 흐르므로, 도(道)와는 갈수록 멀어져 되돌아 수련하기란 더욱 어렵다. 사실 수련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닦는 것으로서, 더욱이 복잡한 사업환경은 바로 心性(씬씽)을 제고할 좋은 기회인데, 일단 퇴직하게 되면 하나의 좋은 수련 환경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아무런 모순도 다 없다면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어떻게 제고하겠는가? 당신의 타산이 간혹 좋기도 하나, 사람의 생명은 한계가 있는 것으로, 당신은 자신의 장래에 남아 있는 시간이 아직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수련은 아이들 장난이 아니며 속인 중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엄숙한 것으로, 으레 그렇게 되려니 생각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일단 기회를 놓치면 육도(六道) 중에서 윤회하게 되는데, 어느 때에 다시 사람 몸을 얻겠는가! 기회와 인연은 오직 한 번뿐이며, 내려놓지 못하는 몽환(夢幻)이 지나가 버리면 비로소 잃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李洪志
1995년 10월 13일

 

법정(法正)

사람이 德(더)가 없으면 천재인화(天災人禍)가 발생하리로다. 땅이 德(더)가 없으면 만물이 조락(凋落)하리로다. 하늘이 도(道)가 없으면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붕괴하며 창궁(蒼穹)이 깡그리 비워지리로다. 법이 올바르면 건곤(乾坤)이 바로 서 생기발랄하고 천지가 견고해지니 법은 영원히 존속하리로다.

李洪志
1995년 11월 12일

 

성자(聖者)

그 사람은 세간(世間)과 천상(天上)에서 천명(天命)을 부여받았으니, 두터운 德(더)를 갖추었을뿐더러 그 마음이 착하고, 큰 뜻을 품고서도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으며(懷大志而拘小節), 법리에 해박하여 미혹을 타파하나니,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제도하여 공이 절로 크도다.

李洪志
1995년 11월 17일

 

사부를 모시다 (拜師)

대법(大法)을 널리 전하니, 소문을 들은 자는 찾고, 얻은 자는 기뻐하는바, 수련자가 날로 많아져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혼자서 배우는 자들은 대개 사부를 모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사부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진전(眞傳)을 받기 어렵다고 근심하지만 실은 법 공부가 깊지 못한 까닭이다. 내가 널리 전함은 바로 널리 제도함이니, 배운 자는 곧 나의 제자이다. 낡은 예의규범의 틀에 얽매임이 없이 표면적인 것을 버리고 오로지 사람 마음만 본다. 만일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으면 사부를 모신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착실하게 수련하는 자는 구하고자 집착하지 않아도 스스로 얻을 것이며, 일체 공(功), 일체 법은 모두 책 속에 있는 것이라, 대법(大法)을 통독(通讀)하면 스스로 얻을 수 있다. 배우는 자는 스스로 변하니 반복적으로 통독함이 이미 도(道) 중에 있는 것이다. 사부는 법신(法身)이 있어 조용히 보호해 주니, 꾸준히 견지하면 훗날 반드시 정과(正果)를 이룰 것이다.

李洪志
1995년 12월 8일

 

명시(明示)

현재 매우 뚜렷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일부 수련생의 元神(왠선)이 몸을 떠났을 때, 어느 한 층 공간을 보고 접촉하여, 그곳이 너무나 아름답고 일체가 모두 진실한 존재라고 느껴, 돌아오려고 생각하지 않아 결국 육신의 사망을 조성해 그 한 경지 중에 남아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모두 삼계(三界)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전에 나는 이 문제를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수련 중에서 어느 한 층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하며, 당신이 전 과정의 수련을 끝마쳤을 때에만 비로소 원만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元神(왠선)이 나가서, 아무리 좋은 곳을 보았다 하더라도 돌아와야 한다.

우리 또 일부 수련생들에게는 일종 착오적인 인식이 있다. 우리 法輪大法(파룬따파)를 연마하면 마치 보험에 든 것처럼 육신이 사망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성명쌍수(性命雙修) 공법으로서, 수련자는 수련하는 한편,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世間法(쓰젠파) 중에서 수련에 정진(精進)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한 층차 중에서 배회하며 무척 힘겹게 한 층차를 제고한 후, 결국 또 이 한 층차 중에서 배회한다. 수련은 엄숙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정해진 수명에 사망하지 않는다고 보증하기 어렵다. 世間法(쓰젠파) 외의 수련은 이 문제가 존재하지 않지만, 世間法(쓰젠파) 이내의 상황은 비교적 복잡하다.

李洪志
1995년 12월 21일

 

누구를 위해 수련하는가(爲誰而修)

어떤 사람이 선전도구를 이용해 기공을 비평하기만 하면, 수련생 중에는 곧 동요되어 연마(煉)하지 않는 일부 사람이 있다. 마치 선전도구를 이용하는 사람이 불법(佛法)보다도 고명하다고 여기는 듯하며, 마치 다른 사람을 위해 연마하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은 압력 앞에서 두려워하며 연마하지 않는데, 이런 사람이 정과(正果)를 이룰 수 있겠는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부처마저도 팔아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두려워하는 마음은 집착이 아닌가? 수련은 바로 큰 파도가 모래를 일 듯 남은 것이야말로 금(金子)이다.

사실 인류사회에는 예부터 지금까지 상생상극이라는 이치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있고, 바른(正) 것이 있으면 사(邪)한 것이 있으며, 선(善)한 것이 있으면 악(惡)한 것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귀신이 있으며, 부처가 있으면 마(魔)가 있게 마련이다. 인류사회는 더욱 이러하다. 정(正)이 있으면 반(反)이 있고, 제창하는 것이 있으면 반대하는 것이 있으며, 믿는 것이 있으면 믿지 않는 것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이 있으며, 공(公)적인 마음이 있으면 사(私)적인 마음이 있고,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기를 위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집단, 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만일 한 가지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그와 같은 크기의 나쁜 저애력이 있기 때문에, 성공한 후에야 비로소 얻음이 쉽지 않음을 느낄 수 있으며, 비로소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 과거 인류의 발전은 줄곧 이랬다(상생상극의 이치는 장래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

다른 한 방면에서 말하자면, 수련은 속인을 초월한 것이다. 기공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가 누구라도 마찬가지로, 속인의 인식이 아닌가? 그가 불법(佛法)과 수련을 부정할 자격이 있는가? 인류의 어떤 조직이 신불(神佛)을 초월할 수 있겠는가? 기공을 비판하는 사람이 부처를 지휘할 능력이 있는가? 그가 부처가 나쁘다고 해서 부처가 나쁘단 말인가? 그가 부처가 없다고 해서 부처가 존재하지 않는가? ‘문화대혁명’ 때의 법난(法難)은 천상(天象) 변화가 조성한 것으로, 불도신(佛道神) 역시 모두 하늘의 뜻에 따라 행하였다. 법난(法難)은 사람의 난(難)이고 종교의 난이지, 부처의 난이 아니다.

종교가 파괴당한 최대의 원인은 사람 마음이 안되기에 조성된 것으로, 부처를 모시는 것은 부처수련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처에게 빌어 횡재하고 재난을 없애고, 아들을 낳도록 보우(保佑)해 달라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생활하겠는가를 위한 것이었다. 사람마다 전생에 모두 아주 많은 업을 빚었는데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어찌 나쁜 일을 하고도 업을 갚지 않을 수 있는가? 마(魔)는 사람 마음이 바르지 않음을 보고 분분히 굴에서 나와 세상에 화란(禍亂)을 일으키는가 하면, 신불(神佛)은 사람 마음이 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 분분히 자리를 떠나 절을 버리고 가버렸다. 절에는 재물을 구하고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여우, 족제비, 귀신, 뱀들을 끌고 들어왔는데 이런 절을 또 때려 부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는 세인(世人)들에게 있다. 부처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는 까닭은, 사람이 모두 어리석은 견해 중에서, 이미 자신을 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대단히 큰 업을 지어 오래지 않아 큰 겁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징벌할 필요가 있겠는가? 실제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모두 나중 어느 한때에 보응(報應)을 받는다. 다만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으며 일이 발생하면 우연한 것으로 여길 따름이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회의 힘이 당신에게 수련하지 말라고 하였다 해서 당신이 수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위해 수련하는 것인가? 그것들이 당신에게 정과를 줄 수 있는가? 그것들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기울어짐은 곧 미신(迷信)이 아닌가? 사실 이야말로 우매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공이 아니라 불법수련(佛法修煉)이다! 어떠한 압력도 모두 불법(佛法)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견정(堅定)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고험하는 것이 아닌가? 근본적으로 법에 대하여 아직 견정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李洪志
1995년 12월 21일

 

불법용어(佛法名詞)

어떤 수련생은 이전에 불교 중의 거사(居士)였기에, 불경 중의 용어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다. 이러한 수련생이 나의 말에 불교와 비슷한 용어가 있는 것을 보기만 하면 곧 불교용어와 같은 뜻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전혀 같은 것이 아니다. 한인지역(漢地)의 어떤 불교용어는 한어 어휘로서 불교의 절대적인 전문용어가 아니다.

관건은 이러한 수련생들이 불교 중의 것을 늘 내려놓지 못한다는 데 있다. 원인은 사상 중에서 불교의 인상이 아직도 작용을 일으키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데 있으며,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한 인식이 모자란 데 있다. 사실은 그런 비슷한 인식이 교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나의 말을 곡해(曲解)한다면, 당신은 불교를 수련하는 것이 아닌가?

李洪志
1995년 12월 21일

 

안을 수련하여 밖을 안정시키다(修內而安外)

사람이 德(더)를 중시하지 않으면 천하대란(天下大亂)을 다스릴 수 없다. 사람마다 경계하므로 살아도 즐거움이 없고 살아도 즐거움이 없으면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노자(老子)가 이르기를 “백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어찌 죽음으로 두렵게 하리오?”라고 했으니 이는 곧 큰 위험이 닥치는 것이다. 천하태평은 백성의 소원이라, 이때 만약 법령(法令)을 강화하여 안정을 구한다면, 도리어 일을 그르친다. 이 우환을 풀려면 반드시 천하에 德(더)를 닦아야만 본(本)을 다스릴 수 있음이라, 신하(臣)가 사(私)적이 아니면 나라는 썩지 않을 것이요, 백성이 수신양덕(修身養德)을 중히 여기고 관료(政)와 백성(民)이 스스로 그 마음을 단속한다면 온 나라가 안정되고 민심을 얻어 강산이 안정될 것이며, 외환(外患)이 스스로 두려워하여 천하가 태평하리니 이는 성인(聖人)이 이루는 것이다.

李洪志
1996년 1월 5일

 

집착을 더 없애자(再去執著)

제자들이여! 사부의 마음이 조급해도 소용이 없다! 당신들은 왜 속인의 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가? 한 걸음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의 협조인을 포함하여 우리 수련생들이 대법(大法) 일을 위한다 할지라도 당신들이 모두 서로 질투한다면, 이래서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내가 느슨하게 관리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 그 속인을 놓아버리지 못하여 일하는 중에 마음의 평형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법(大法)은 전 우주의 것이며, 작디작은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누가 대법(大法) 일을 하든지 모두 대법(大法)을 널리 전하는 것으로, 무슨 당신이 하고 내가 하는 것이 있는가. 당신들이 이런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래 천국에까지 갖고 가서 부처와 다툴 것인가? 누구도 대법(大法)을 도맡을 수 없다.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그 심리를 없애버려라! 당신이 마음속으로 어떤 일 때문에 내키지 않아 할 때, 그것은 집착심이 조성한 것이 아닌가? 우리 수련생들은 자신이 그중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로지 나 리훙쯔(李洪志)를 제외한 당신들은 모두 수련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 한번 자신을 돌아보기를 희망한다. 여러분은 내가 무엇 때문에 말겁 시기에 이렇듯 큰 법을 전하는지 생각해 보라. 만약 내가 진상(眞相)을 말해버린다면 내가 바로 사법(邪法)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꼭 이를 위하여 법을 배우러 올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하고자 하여 법을 배우는 것이 된다. 사람을 제도함에 오로지 바른 것을 구해야만 비로소 당신들의 집착심을 제거할 수 있다. 집착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수련 성취하지 못함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과감히 내려놓고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는가? 사실 내가 대법(大法)을 전함에 필연 말하기 어려운 원인이 있으며, 일단 진상이 나타나면 후회해도 늦은 것이다. 나는 일부 사람의 마음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또 당신에게 직접 말해 줄 수 없다. 사부가 말하면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고, 한평생 집착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한 명의 제자도 망치고 싶지 않다. 사람을 제도하기란 몹시 어려우며 깨닫게 하기는 더욱 어렵다. 특히 사람마다 모두 자신을 그중에 놓고 깨달아야 한다. 대법(大法)이 좋은 줄 다 알면서도 왜 내려놓지 못하는가?

李洪志
1996년 1월 6일

 

실증(證實)

불법(佛法)은 사람을 제도할 수 있지만, 사람을 제도하기 위해 비로소 불법(佛法)이 생긴 것은 아니다. 불법(佛法)은 우주ㆍ생명ㆍ과학의 불가해를 밝혀낼 수 있으며, 인류로 하여금 다시 정확한 과학의 길을 걷게 할 수 있지만, 불법(佛法)이 인류 과학을 지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불법(佛法)은 우주의 특성이며 물질의 본원을 만드는 요소로서, 우주가 생기게 된 원인이다.

그렇다면 장래에 불법(佛法) 중에서 지혜가 열린 전문가, 학자가 매우 많을 것이며 그들은 새로운 인류의 각 방면 학문의 개척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불법(佛法)은 당신을 개척자로 만들기 위해 당신에게 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수련자이기 때문에 당신으로 하여금 얻게 한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먼저 수련자이고 그런 다음에야 전문가이다. 그렇다면 수련자로서 일체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대법(大法)을 널리 알리고, 대법(大法)은 바른 것이며 진정한 과학으로서 설교와 유심(唯心)이 아님을 실증하는 것은 매 수련자 자신의 책임이다. 우주의 가장 거시적인 것에서 가장 미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속인사회의 일체 지식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하여, 이 홍대(洪大)한 불법(佛法)이 없으면 곧 일체가 없다.

李洪志
1996년 1월 8일

 

수련자는 자연히 그중에 있다(修者自在其中)

한 수련자로서 속인 중에서 만나는 일체 고뇌는 다 고비를 넘는 것이고, 만나는 일체 찬양(讚揚)은 다 고험이다.

李洪志
1996년 1월14일

 

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

李洪志
1996년 1월 21일

 

무엇이 미신인가(何爲迷信)

미신이란 이 두 글자를 말하기만 하면 현대의 중국인들은 정말로 안색이 변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믿지 않는 일을 모두 미신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실 미신이란 두 글자는 ‘문화대혁명’ 때, 극‘좌’적인 외투를 걸쳤는데, 그때 민족문화에 대한 파괴력이 가장 강한 한 마디 말이었고 가장 무서운 큰 모자로서, 두뇌가 단순하면서도 완고한 그런 사람들의 가장 무책임한 한 마디 구두어로 되어 버렸다. 심지어 이른바 유물주의자로 자칭하는 그런 사람들은 그의 지식 외의 일체 또는 과학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 것을 모두 미신이라고 한다. 이런 이론에 따라 사물을 인식한다면, 인류는 진보가 있을 수 없으며 과학도 발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의 새로운 발전과 발견은 모두 앞사람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유심적인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일단 무엇을 믿으면 그 자체가 바로 미혹된 것이 아닌가? 그럼 어떤 사람이 현대과학과 현대의학을 믿는 것은 미신이 아닌가? 사람들이 우상(偶像)을 숭배하는 것은 미신이 아닌가? 사실 미신이란 두 글자는 아주 통상적인 명사이다. 일단 사람들이 진리를 포함하여 무엇에 몰두하여 믿는다면 바로 미신인 것으로, 폄하하는 뜻이 없다. 다만 다른 심보를 가진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자 할 때, 그것에 이른바 봉건적 내포를 한 층 뒤집어씌워 생각이 단순한 그런 사람들이 따르도록 더욱 선동할 수 있게 인심을 현혹하는 한 마디 전투적인 말로 만들었다.

사실 이른바 미신이란 그 두 글자 자체는 이렇게 응용하지 말아야 하며, 억지로 가한 내포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미신 두 글자에 대하여 말한다면 나쁜 일이 아니다. 군인이 기율(紀律)을 미신(迷信)하지 않으면 전투력이 없고, 학생이 학교와 선생님을 미신하지 않으면 지식을 얻을 수 없으며, 어린이가 자신의 부모를 미신하지 않으면 교양(敎養)할 수 없고, 사람이 자신의 사업을 미신하지 않으면 사업을 잘할 수 없으며, 인류에게 신앙이 없다면 곧 도덕규범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에는 선념(善念)이 없으며 사념(邪念)에 점거당하게 된다. 이때 인류는 도덕이 급속히 떨어지며 사념(邪念)의 작용 하에서 사람마다 경계하게 된다. 사욕(私慾)을 만족하게 하려고 악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미신 두 글자에 이른바 반대되는 뜻(反義)의 내포를 뒤집어씌운 그런 나쁜 사람이 비록 자신의 목적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인류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李洪志
1996년 1월 22일
1996년 8월 29일 수정

 

병업(病業)

신수련생이 공을 배우기 시작할 때와 이미 몸조리를 거친 노수련생에 관하여 말한다면, 왜 수련 중에 신체가 불편함이 나타나 마치 중병(重病)을 얻은 것과 같은가? 그뿐만 아니라 매 한 기간 시간이 지나 한 번씩 나타나는가? 나는 설법 중에서 당신들에게 그것은 소업(消業)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당신이 생생세세(生生世世) 빚진 업력을 없애버리는 동시에 역시 한 사람의 오성(悟性)을 제고하는 것이며 아울러 역시 수련생이 줄곧 世間法(쓰젠파) 수련을 벗어날 때까지 대법(大法)에 대하여 견정(堅定)한가 하지 않은가를 고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괄적인 말이다.

사실 사람은 생생세세 얼마나 되는 생을 거쳤는지 모른다. 매 한 생에 사람은 모두 아주 많은 업력을 빚져 백 년 후 전생(轉生)할 때, 일부분 병업(病業)은 신체 속의 미시적인 속에 짓눌려 들어가게 된다. 전생할 때 새로운 표면물질인 육신은 병업(病業)이 없다(그러나 업이 커서 예외인 것도 있다.). 그럼 전 한 생에 눌려 들어간 것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데, 표면육체로 되돌아왔을 때, 사람은 곧 병이 온다. 하지만 병이 발작할 때, 흔히 모두 표면물질 세계에서 한 가지 외인(外因) 조건의 촉발(觸發)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그것은 우리 표면물질 세계의 객관적인 법칙에 부합한다. 다시 말해 세간의 이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속인은 곧 병이 내원(來源)한 진상을 알 수 없으며, 곧 미혹되어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은 일단 병이 있기만 하면 약을 먹거나, 또는 각종 방법을 취하여 치료하는데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병을 또 신체 속으로 짓눌러 들어가게 한다. 이렇게 되어 전 한 생에 나쁜 짓을 하여 남겨 놓은 병업을 갚지 못하게 된다. 그럼 이 일생에 또 일부 좋지 못한 일을 하여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 그리하여 또 새로운 병업이 나타날 수 있으며 각종 병을 얻게 된다. 하지만 사람은 약을 먹거나 각종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채용하여, 병을 또 신체 속에 짓눌러 들어가게 한다. 수술 역시 다만 표면물질 공간의 살을 잘라버렸을 뿐, 다른 공간 속의 병업은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현대의학의 기술로는 도무지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병이 재발하면 곧 다시 치료하곤 한다. 백 년 후 다시 전생하여 병업이 있으면 다시 신체 속으로 짓눌러 들어가게 되며 왕복 순환하는데, 한 생 한 생에 얼마나 많은 병업이 사람의 신체 속에 남겨졌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의 사람은 모두 업이 구르고 굴러서 온 것이며 병업을 제외하고 또 기타 업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은 생활 중에서 고생이 있고 난(難)이 있으며 시비(是非)가 있을 수 있는데, 오로지 행복만 바라고 업을 갚지 않는다면 그 어찌 될 말인가? 사람이 이때에 이르면 업이 커서 언제 어디서나 모두 업 속에 잠기게 되고, 언제 어디서나 모두 내키지 않는 일이 있으며, 문만 나서면 좋지 않은 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순에 부닥치면 참지 않으며 이전에 진 업의 빚(業債)을 갚고 있음을 모른다. 당신이 나를 잘 대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더욱 험하게 대하여, 업을 갚지 못하고 또 새로운 업력을 빚어내게 되므로, 사회 기풍이 날로 떨어져 사람마다 경계하게 된다. 또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지금의 사람은 어찌 된 일인가? 지금의 사회는 어찌 된 일인가?’ 인류가 이처럼 내려간다면 지극히 위험하다!

그럼 우리 수련하는 사람은 사부가 업을 없애버린 것 외에, 자신이 또 일부분을 갚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체가 불편할 수 있으며 마치 병이 있는 것 같은 감각이 있게 되는데, 수련은 바로 사람 생명의 본원에서부터 당신에게 청리(淸理)해 주기 때문이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매 한 층에 모두 병업이 있다. 그렇다면 곧 가장 중심에서부터 당신에게 신체를 청리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단번에 전부 밀어낸다면 사람이 견뎌내지 못하여 생명위험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다만 매 한 기간 사이를 두고 하나 둘을 밀어내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으며 괴로운 과정 중에서 또 업을 갚는다. 하지만 이 역시 다만 내가 당신에게 업을 없애준 다음, 당신 자신이 감당하도록 남겨준 조그마한 것에 불과하다. 世間法(쓰젠파)의 최고형식, 정백체(淨白體) 상태가 될 때까지 수련하여 전부 밀어낸다. 하지만 병업이 극히 적은 것과 기타 특수한 경우도 있다. 出世間法(추쓰젠파) 수련은 바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나한체(羅漢體) 수련이므로 병업이 없다. 그러나 世間法(쓰젠파) 외의 수련에서 원만하지 못하여 아직도 고층차로 수련해야 한다면 그는 또 고생이 있고 난(難)이 있으며, 층차를 제고하기 위해 고비를 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모두 사람과 사람, 사람과 일 사이의 心性(씬씽)적인 모순과 집착심을 더 제거하는 것이지 신체의 병업은 없다.

병업을 없애버리는 이런 일은 누구도 속인에게 함부로 해줄 수 없다. 수련하지 않는 속인에게는 전혀 불가능하며, 오직 병 치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함부로 속인에게 해주는 것은 곧바로 하늘의 이치를 파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쁜 짓을 하고도 업을 갚지 않고, 빚을 지고 갚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 안 되는 것이며, 하늘의 이치가 용납하지 않는다! 일반 기공치료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로 신체 속으로 짓누른다. 한 사람의 업력이 몹시 클 때, 아울러 아직도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곧 훼멸(銷毀)에 직면하게 되며 죽을 때 형신전멸(形神全滅)하여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한다. 대각자(大覺者)가 사람에게 병을 치료해 주면 그 병의 업력근원을 철저히 없애버릴 수 있다. 하지만 모두 목적이 있게 하는 것으로, 주로 사람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李洪志
1996년 3월 10일

 

수련자 금기(修者忌)

명(名)에 집착함은 유위(有爲)의 사법(邪法)이라, 세간(世間)에 이름을 날리려 필연 말은 선하게 하나 마음에 마(魔)가 있어, 중생을 미혹게 하고 난법(亂法) 한다.

돈에 집착함은, 재물을 구하는 거짓 수련이라, 교(敎)를 파괴하고 법을 파괴하여 백년을 헛되게 보냄이니, 부처수련이 아니다.

색(色)에 집착함은, 악한 자와 구별이 없으며 입으로는 경문을 읽으면서도 음흉한 눈길을 마주치니 도(道)와는 너무나 먼 것이라, 이는 사악한 속인이다.

육친정(親情)에 집착함은, 기필코 그로 인해 지치고 얽매이며 마에 사로잡히게 됨이라, 그 정사(情絲)를 잡아 쥐어 일생토록 방해받으니, 나이가 들면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

李洪志
1996년 4월 15일

 

원용(圓容)

(1)

사람은 부동(不同)한 사업환경에서 부동한 살생문제가 존재한다. 생명의 평형 역시 부동한 표현형식이 존재한다. 수련자로서 우선 마땅히 일체 집착을 내려놓고 속인의 사회상태에 부합해야 하는데 이 역시 한 층의 법을 수호하는 표현이다. 인류의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한 층의 법은 곧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2)

생명은 법 중에서 자연히 존망(存亡)이 있다. 우주에는 성(成)ㆍ주(住)ㆍ괴(壞)가 있고, 사람은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가 있는 것으로, 생명의 평형에는 비자연적인 존망이 마찬가지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으니, 깡그리 버리는 것만이 누락이 없는 더욱 높은 법리(法理)이다.

李洪志
1996년 4월 19일

 

무루(無漏)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 법은 부동한 층차가 있으므로 법에 대한 수련자의 인식도 자신이 이 한 층까지 수련된 인식이며, 매 수련자의 법에 대한 이해가 부동함도 매 사람이 있는 층차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부동한 층차의 수련자에 대해, 법은 그에 대해서도 부동한 층차의 요구가 존재한다. 버림은 속인의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것의 체현이다. 만약 정말로 탄연(坦然)하게 버릴 수 있으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자라면, 실은 이미 그 한 층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련은 곧 제고를 위한 것으로, 당신이 이미 이 집착을 버릴 수 있다면 왜 집착을 두려워하는 그 자체도 버리지 못하는가? 누락이 없이 버린다면 그것은 더욱 높은 버림이 아닌가? 하지만 수련자 또는 속인은 근본적인 버림마저도 하지 못하면서 역시 이 이치를 담론하는데, 그것은 집착심을 버리지 않기 위해 구실을 찾아 난법(亂法)함에 불과하다.

李洪志
1996년 4월 26일

 

수련과 사업(修煉與工作)

우리 法輪大法(파룬따파) 제자들은 절에서 전업수련(專修)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절대다수는 속인사회에서 수련한다. 대법(大法)을 배우고 연마함을 통하여 여러 사람은 모두 명(名)ㆍ이(利)를 담담하게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법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문제가 나타났다. 즉 극소수 제자는 속인 중의 사업을 하지 않고, 지도자로 등용하려 해도 하지 않아, 사업과 생활상에서 많은 불필요한 교란을 조성하게 했으며 수련에 직접 영향 주게 되었다. 또 일부 정당하게 사업하던 사람들도 돈과 재물에 대하여 담담히 여기는 동시에, 사업하면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고 자신의 수련에 영향을 준다고 느껴 역시 그만두었다.

사실 대법(大法)의 내포는 아주 깊다. 속인의 마음을 내려놓음은 속인의 사업을 내려놓음을 가리킨 것이 아니며, 명(名)ㆍ이(利)를 내려놓음은 속인사회를 이탈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거듭 제기하였다. 속인사회 중의 수련은 속인사회의 상태에 부합해야 한다고.

다른 한 방면에서 볼 때, 속인사회의 지도적인 일을 모두 개인적인 명(名)ㆍ이(利)를 내려놓을 수 있는 우리 이런 사람이 한다면, 장차 국민에게 얼마나 큰 좋은 점을 가져올 것인가? 만약 탐욕심이 아주 심한 사람이라면 사회에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겠는가? 만일 사업하는 사람이 대법(大法)을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사회의 기풍은 곧 어떠할 것인가?

 

우주대법[宇宙大法(佛法)]은 최고에서부터 최저의 한 층에 이르기까지 관통된 것이며 완정(完整)한 것으로, 속인사회 역시 한 층 법의 구성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마다 대법(大法)을 배우고, 사람마다 모두 사회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속인사회는 곧 존재하지 않게 되며 이 한 층의 법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속인사회 역시 가장 낮은 한 층에서 불법(佛法)의 체현이며 또한 이 한 층 불법(佛法) 중에서 생명과 물질이 존재하는 형식이다.

李洪志
1996년 4월 26일

 

시정(糾正)

현재 각지에서는 모두 연구회에서 제출한,

대법(大法)을 정독(精讀)하고

心性(씬씽)을 진수(眞修)하고

동작을 고심이 연마(苦煉)하자

……

등을 법 혹은 나의 말로 삼아 전하고 배운다. 사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며, 또 깊은 내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법이 아니다. 정독(精讀)하라는 의미는 법 공부에 대한 나의 요구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사실 독서에 관하여 나는 95년 9월 9일에 쓴 ‘법을 배우다’ 중에서 이미 아주 명확하게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독(精讀)이라는 뜻은 ‘법 공부’에 대하여 엄중한 교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앞으로 반드시 이 문제의 심각성에 주의해야 한다. 나는 이미 불교가 인도에서 실전(失傳)하게 된 원인과 교훈을 말한 적이 있다. 만일 앞으로 주의하지 않는다면 곧바로 난법(亂法)의 시작이다. 주의하라. 문제가 나타나면 책임을 찾지 말고 자신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아야 한다. 또한, 누가 썼는가를 추궁하지 말고 교훈을 접수하여 앞으로 주의하도록 해야 한다.

李洪志
1996년 4월 28일

 

금강(金剛)

대법(大法)으로 하여금 천고불변(千古不變)하게 하려면, 아직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늘 이러한 수련생이 있다. 과시심과 남달리 특별한 것을 내세우려는 심리작용으로 말미암아 기회만 있으면 대법(大法)에 대해 교란하는 일부 일들을 하는데, 어떤 때는 아주 심각하다. 예컨대 최근 한 시기 이래, 어떤 사람은 내가 단독으로 어느 수련생에게 동작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고 줄곧 말하고 있다(실은 수련생이 나에게 물었을 때 동작을 좀 시정해 주었을 뿐임). 그리하여 내가 몇 년래 각지에서 공을 전한 동작을 부정하였다. 나 본인이 아직 있고, 교공(敎功) 비디오테이프가 있는 상황에서도 버젓이 대법(大法)의 동작을 고치고 있다. 즉 수련생에게 연공 테이프에 따라 하지 말고, 그가 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 가르치며, 무슨 스승님의 공이 높아 수련생과 같지 않다는 등의 설을 말하면서, 수련생에게 우선 자신의 정황에 근거해 하고, 나중에 다시 천천히 개변하도록 하라는 등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공을 가르침에 한꺼번에 제대로 다 가르쳤다. 목적은 바로 수련생이 제멋대로 고칠까 봐서이다. 기제(機制)가 일단 형성되면 도무지 고칠 수 없다. 보기에는 일이 그다지 큰 것 같지 않지만, 사실은 심각한 난법(亂法)의 시작이다. 또 어떤 사람은 과도적인 동작을 단독적인 동작으로 삼아 수련생에게 규범적으로 하도록 하는데, 이것은 남달리 독특한 것을 내세우려는 것이다. 현재 각지에서 이미 아주 큰 영향을 조성하였다. 제자들이여! 내가 공을 가르친 비디오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리 쉽게 따르는가? 대법(大法)은 엄숙한 우주대법(宇宙大法)으로서, 만일 그를 조금만 어지럽혀도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한 수련자로서 대범하게 수련해야 하며 큰 것에 착안해야 한다. 매 사람의 동작이 모두 똑같고 조금도 차이가 없이 한다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동작은 원만의 일종 형식으로서,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쇠뿔 끝을 파고들지 말고 心性(씬씽)에 더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한다. 사실 대법(大法)에 대한 교란은, 대부분 우리 내부에서 오며 외래적인 요소는 다만 극소수 사람을 어지럽힐 뿐, 법을 개변하기는 불가능하다. 현재와 장래를 막론하고 우리의 법을 혼란하게 하는 것은 오직 내부 제자일 뿐으로, 절대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법은 금강부동(金剛不動)한 것이다. 누가 어떠한 구실, 어떠한 원인, 어떠한 상황으로도 모두 우리가 원만에 사용하는 동작을 조금도 고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동기가 좋든 나쁘든 모두 난법이다.

李洪志
1996년 5월 11일

 

광언을 하지 말라(不講狂語)

최근 일종 설이 있다. 여러 사람이 대법(大法)을 널리 전할 때, 일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법을 얻고 수련의 길을 걷게 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람을 제도했다고 하며, “나는 오늘 몇 사람을 제도했는데 당신은 몇 사람이나 제도했는가.” 등을 말한다. 사실 사람을 제도하는 것은 법이며, 이 일을 하는 것은 오로지 사부뿐이다. 당신들은 다만 인연이 있는 사람을 인도하여 법을 얻게 했을 뿐이다. 정말로 제도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여전히 그 사람이 수련하여 원만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고 정해야 한다. 절대 주의하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을 함부로 하면 부처마저도 놀라게 되는데, 자신의 수련에 장애를 조성하지 말고 이 방면에서도 수구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명백하기를 바란다.

李洪志
1996년 5월 21일

 

급히 깨어나라(驚醒)

대법(大法)을 배우며 실속 있게 수련할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많은 수련생이 다그쳐야 함을 알아 멈추지 않고 정진(精進)한다. 그러나 일부 수련생은 시간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며 생각을 불필요한 곳에 쓰고 있다. 『전법륜』 이 한 부의 대법(大法)을 찍어 낸 때부터 많은 사람이 나의 설법 녹음과 그를 대조하고는 연구회에서 스승님의 말씀을 고쳤다고 한다. 또 일부 사람은, 이 책은 누구 누구누구가 도와서 쓴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대법(大法)을 파괴한다. 지금 내가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겠다. 대법(大法)은 나 리훙쯔(李洪志)의 것으로서 당신들에게 전하고 제도하는 것이며 나 리훙쯔(李洪志)의 입으로 말한 것이다. 아울러 나는 설법할 때, 어떠한 초고와 자료도 없으며, 다만 매일 수련생에게 말할 내용을 적은 한 장의 종이가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아주 간단하며 다른 사람이 봐도 알지 못할 단지 몇 가지 문제가 있을 뿐이다. 나의 매 차례 설법은 모두 부동(不同)한 각도에 입각한 것이며 또 수련생들의 접수능력을 보고 말한다. 그러므로 매번 설법할 때, 나는 같은 문제를 부동한 각도에서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한 부의 법은 우주의 특성이고, 위대한 불법(佛法)의 진실한 체현으로서, 내가 수련하여 개오(開悟)한 후, 나 자신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던 것을 기억해 냈고 또 속인의 언어로 그를 말해 냄으로써, 당신들과 천상에 이르기까지 전하여 법은 건곤(乾坤)을 바로잡는다. 배우는 자들의 수련에 편리하게 하려고, 나는 수련생을 지정하여 내가 말한 내용을 녹음에서 원래 말을 조금도 고치지 않고 기록하게 했으며, 그런 다음 나에게 제출하게 하여 수정했다. 수련생은 단지 내가 수정한 것을 다시 한 번 베끼거나 컴퓨터로 타자하여 내가 다시 수정하는 데 편리하도록 했을 뿐이다. 『전법륜』으로 말하면, 나 자신이 직접 세 번 수정하여 탈고한 후 출판한 것이다.

이 한 부 대법(大法)의 내포를 다른 사람은 한 획도 바꾸지 않았는데 누가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녹음과 같지 않은 곳이 있게 된 원인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수련의 편리를 위해 나는 여러 차례의 설법을 하나로 합쳐 수정하였다. 둘째, 내가 설법할 때, 수련생의 부동한 접수능력과 당시의 상황과 환경에 근거하여 말했다. 그럼 책으로 정리해 내자면 반드시 언어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 셋째, 강의와 문자는 수련자가 학습할 때 오차가 나타날 수 있으므로 조절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설법할 때의 상태와 구어(口語)를 유지했다. 『전법륜(권2)』와 『파룬따파의해(法輪大法義解)』 역시 마찬가지로 완전히 내가 직접 수정하여 출판한 것이다. 『전법륜(권2)』는 내가 부동한 층차의 사유방법으로 쓴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문법이 같지 않음을 느끼고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런 것은 본래 속인의 것이 아니잖은가! 사실 『권2』는 후세사람에게 남겨, 지금 인류의 부패 정도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사람들에게 중대한 교훈을 남기려는 것이다. 수정본을 포함한 『法輪功(파룬궁)』, 그것은 다만 첫 시작에 기공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인식하게 한 하나의 과정 중의 것이다.

난법(亂法)에는 여러 형식이 있다. 그중 내부 제자의 무의식적인 파괴가 가장 알아차리기 어렵다. 석가모니교의 말법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 것이며 교훈은 엄중하다.

제자들은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法輪大法(파룬따파)의 모든 경서는 모두 내가 말한 법이며, 모두 내가 직접 수정하고 정리한 것이다. 이후로 어떠한 사람이든지 모두 나의 설법 녹음 중에서 다시 발췌해 내거나 문자 자료로 정리하지 못한다. 이른바 강의와 문자적 차이의 대조 따위를 포함한 그 어떠한 구실이든지 막론하고 모두 난법이다.

천체(天體)의 변화, 인류의 발전 일체는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인류사회의 동향, 그것은 역사적인 배치이며 천상(天象)의 이끎 하에 나타난 것으로, 장래에 전 세계적으로 더욱 많은 사람이 대법(大法)을 배우게 될 것인즉, 이는 사람이 일시적인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하나의 큰일(大事)인데 역사적으로 각 방면의 배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사실 내가 한 일체는 모두 수많은 해 이전에 이미 배치한 것으로, 법을 얻은 사람을 포함해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표현은 오히려 속인 중의 형식과 같다. 사실 나의 금세(今世)의 몇 사부가 나에게 전수해 준 것 역시 몇 세기 전에 내가 의도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얻게 한 것이며 연분(緣份)이 닿기를 기다려 그들이 다시금 나에게 되돌아 전수하게 했고, 그리하여 나의 법 전부를 계발하고 깨닫도록 배치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이 한 부의 법은 다만 인류 이 한 층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며, 더욱 높은 층에서도 모두 배운다. 왜냐하면, 아주 큰 천체(天體) 범위가 우주의 특성을 벗어났기 때문에 비로소 법을 바로잡게 된 것이다. 인류는 방대한 우주 중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지구 역시 다만 하나의 우주 먼지에 불과하다. 사람이 만일 고급 생명의 중시를 받고자 한다면, 그럼 수련해야 한다! 역시 고급 생명이 되어야 한다!

李洪志
1996년 5월 27일

 

법정(法定)

2년래 수련생들의 수련 중에서 일부 문제가 나타났으며, 나 역시 줄곧 수련생들의 수련상황을 관찰하고 있다. 나타난 문제를 제때에 바로잡기 위해 나는 늘 목적 있게 일부 짧은 문장(수련생들은 경문이라고 부름)을 써서 여러 사람의 수련을 지도하였다. 목적은 후세 사람들에게 한 갈래 안정적이고 건강하며 정확한 대법(大法) 수련의 길을 남기려는 것이다. 천추만대(千秋萬代)로 모두 내가 직접 여러 사람에게 남겨놓은 이 길을 따라 수련해야만 비로소 원만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내가 홍콩(香港)의 한 연공장에서 자료 한 부를 보았는데 외지에서 전해간 것이었다. 그중 두 편은 내가 발표하려는 단문(短文)이 아니었다. 이것은 엄중하게 의식적으로 대법(大法)을 파괴하는 짓이다! 설사 녹음에서 사사로이 정리했다 하더라도 잘못된 것이다! 나는 ‘급히 깨어나라(驚醒)’는 한 편 중에서 이미 명확히 하였다. 어떠한 사람이든지 어떠한 구실로도 나의 강의 녹음에서 문자 자료를 정리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했다면 곧 법을 파괴하는 짓이다. 동시에 나는 내가 강의할 때, 당신들이 쓴 개인기록을 내놓아 전하지 못한다고 거듭 강조했는데, 왜 당신들은 아직도 이렇게 하는가? 무슨 마음의 작용 하에서 쓴 것인가!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겠다. 내가 정식으로 출판한 몇 권의 책과 내가 서명하고 날짜가 있는 단문(短文)을 연구회에서 각지에 내려보낸 것을 제외하고 사사로이 정리한 것은 모두 난법(亂法)이다. 수련은 당신 자신의 일이며, 무엇을 구하는가는 당신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속인은 모두 마성(魔性)과 불성(佛性)이 있으므로 사상이 옳지 않으면 마성이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내가 다시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겠다. 외부인은 영원히 모두 법을 파괴할 수 없으며 법을 파괴하는 것은 다만 내부 수련생일 뿐이다. 기억하라!

나 리훙쯔(李洪志)가 걸어가는 매 한 걸음은 모두 후대 대법(大法)의 유전(流傳)을 위해 정한 불변불파(不變不破)의 형식이다. 이렇게 큰 법은 일시에 열조를 올리고 끝마칠 일이 아닌즉, 만세(萬世)토록 영원히 조금의 편차(偏差)도 생겨서는 안 된다. 나부터 시작하여 대법(大法)을 수호함은 마찬가지로 영원히 대법 제자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대법(大法)은 우주 중생의 것으로 그 속에 당신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李洪志
1996년 6월 11일

 

수련과 책임(修煉與負責)

정진실수(精進實修)하는 목적은 하루빨리 원만하기 위해서다. 수련자는 바로 속인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사람이다. 제자들이여, 당신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각지 보도소, 총보도소와 학회에서 대법(大法)에 책임지기 위해 일체 보도원과 보도소장을 바꿀 권리가 있으므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책임자를 바꿀 수 있다. 왜냐하면, 책임자는 먼저 수련자이며 수련하기 위해 온 것이지, 두목이 되자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올라갈 수도, 내려올 수도 있어야 한다. 책임자가 되는 것도 수련을 위한 것이고 책임자에서 내려와도 마찬가지로 수련해야 한다. 만일 교체되어 내려온 사람이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아 한다면, 그것은 집착심이 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이는 그 하나의 마음을 제거하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이처럼 아직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바로 교체한 것이 옳다는 것을 설명한다. 책임자가 되기에 집착하는 자체가 바로 수련목적이 불순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일깨워주는바, 제자들이여! 당신들이 이 마음을 제거하지 않고는 원만하기가 불가능하다.

李洪志
1996년 6월 12일

 

베껴 쓴 경문의 처리(手抄經文的處理)

현재 대법(大法)을 배우는 사람이 갈수록 더 많아져 매주 배로 늘어나고 있다. 출판 부서에서 출판한 책이 모자라,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일부 지역 또는 농촌에서는 책을 살 수 없다. 어떤 수련생이 나에게 베껴 쓴 대법(大法) 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문의하였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겠다. 잠시 당신들이 대법(大法)을 학습할 때 베낀 『전법륜』 또는 기타 경문을, 농촌에 가서 공을 전하고 법을 전하는 사람이 가지고 가서 농민들에게 줌으로써, 그들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그러자면 수련생이 베껴 쓴 책의 필적이 정연해야 하며 교육수준이 높지 않은 농민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베껴 쓴 책은 인쇄한 책과 같은 법의 위력이 있다.

李洪志
1996년 6월 26일

 

법회(法會)

제자들이 수련 중의 감수와 심득(心得)을 서로 담론함은 아주 필요한 것이다. 오로지 의식적으로 자신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촉진하고 공동 제고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대법(大法)을 널리 전하는 것을 추진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두 일부 수련심득교류회를 열었는데, 형식과 내용에서 볼 때 모두 대단히 좋고 건강한 것이다. 하지만 수련생의 발언고(發言稿)는 반드시 보도소에서 심사하여 결정해야 한다. 수련과 관계없는 정치적인 문제나 수련과 사회의 부정확한 경향문제가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역시 사람들이 속인의 이론학습 속에서 양성한 화려하지만, 실속 없이 허풍을 떠는 풍조를 피해야 하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과시 심리로 상부에 보고할 자료를 조직하는 식의 문장을 말해서는 안 된다.

성(省), 시(市) 일급 총보도소에서 주최하는 대형 수련심득교류회를 전국적 형식으로 하지 말아야 하며, 전국에서 세계에 이르기까지의 형식은 총회에서 꾸린다. 또 너무 빈번하게 하지 말아야 하며 매년 한 번씩 함이 비교적 좋다(특수상황 제외). 형식이나 경쟁에 치우치지 말고, 진정으로 수련을 촉진할 수 있는 하나의 장엄한 법회로 만들어야 한다.

李洪志
1996년 6월 26일

 

대법(大法) 석가장 총보도소에 보내는 편지
(給大法石家莊總站的信)

대법(大法) 석가장(石家莊) 총보도소

나는 당신들의 심득교류회가 저애 받은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원인은 세 가지가 있는데 당신들도 이번 교훈을 꼭 총괄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한 차례는 직접 베이징(北京), 전국의 대법(大法) 활동에 이르기까지 파급되었으며 앞으로 대법(大法)의 정상적인 활동에 대하여 일정한 부(負)작용이 있다. 내가 생각하건대 당신들도 꼭 인식하게 될 것이며 나중에 더욱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수련생 개인이 연 보고회에 관하여 나는 몇 마디 더 말하겠다. 공능이 있는 소수 수련생의 정황은 과학의 일면에서 대법(大法)의 과학성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과학기술계, 학술계에 대법(大法)을 인식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지, 그로 하여금 수련생 중에서 선전하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점이 조금도 없다. 단지 신수련생 또는 착실하게 법을 배우지 않은 제자들로 하여금 집착심이 일어나게 할 뿐이다. 잘 배운 제자들은 이런 보고를 들을 필요도 없이 여전히 견정하게 대법(大法)을 수련할 것이다.

또 더욱 중요한 한 가지는, 내가 2년간 법을 전수함에 제자들에게 착실하게 수련할 수 있는 2년을 주었다. 제자들이 착실하게 수련하는 2년 중에 나는 착실하게 수련하는 것과 상관없는 어떠한 활동도 없게 했고, 이미 수련생에게 한 걸음 한 걸음 순서 있게 배치한 제고과정을 교란하지 못하게 했다. 만약 보고가 과학, 학술계에 대법(大法)의 과학성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제한된 수련제자들에게 말한다면, 당신들이 생각해 보라, 수련생들에게 이것보다 더 큰 교란이 있겠는가? 수련생을 교란하지 않기 위해 나마저도 수련생과 만나지 않는다. 수련생이 나를 만나면 최소한 며칠 동안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법신이 수련생에게 배치해 준 순서를 혼란하게 할 수 있다. 이 일을 나는 연구회와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 이 수련생에게 똑똑히 말하지 못했을 수 있다. 일이 지난 다음 여러분들은 모두 책임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 주로 당신들이 인식하지 못했을 따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오늘 하는 일체는 모두 앞으로 천추만대 대법(大法)의 유전(流傳)을 위해 기초를 닦는 것으로서, 하나의 완전하고 정확하며 잘못 없는 수련형식을 전해 내려가는 것이다! 내가 오늘 이 일을 지적함은 비평이 아니라, 수련형식을 수정(修正)하여 후세사람에게 남기려는 것이다.

李洪志
1996년 6월 26일

 

정성(正性)

대법(大法)을 착실히 수련해 감에 따라 많은 제자가 잇따라 개오(開悟)하고 점오(漸悟)하여 다른 공간의 진실하고 장려(壯麗)하며 수승(殊勝)하고 미묘한 광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개오과정 중에 제자는 격동되어 나의 법신을 보고 두 번째 사부님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나의 법신을 진정한 독립적인 사부로 아는데,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법신은 바로 없는 곳이 없는 나의 지혜적인 형상의 표현으로서 독립적인 생명체가 아니다. 또 어떤 제자는 法輪(파룬)마저도 ‘法輪(파룬) 사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틀려도 크게 틀린 것이다. 法輪(파룬) 역시 나의 법력(法力) 특징과 대법(大法) 지혜의 또 다른 체현 형식으로서, 묘하기 그지없다. 法輪(파룬)은 우주의 거시적인 것에서 미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일체 물질의 법성(法性)의 체현이며 역시 독립적인 생명체가 아니다.

제자들이여 단단히 기억하라. 나의 법신, 法輪(파룬)이 당신들을 위해 매우 크고 아주 현묘하며 수승(殊勝)한 일을 함을 보고 속인의 마음으로 인식하여 나의 법신, 法輪(파룬)을 떠받들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은 오성(悟性)과 心性(씬씽)이 너무나 부족한 혼잡한 표현이다. 사실 일체 표현형식은 모두 내가 홍대(洪大)한 법력으로 법을 바로잡고 사람을 제도하는 구체적인 체현이다.

李洪志
1996년 7월 2일

 

선을 알기 쉽게 해설(淺說善)

선(善)은 부동한 층차와 부동한 공간에서 우주 특성의 표현이며 또한 대각자들의 기본 본성이다. 그러므로 수련자는 반드시 선(善)을 수련해야 하며 眞(쩐)ㆍ善(싼)ㆍ忍(런) 우주특성에 동화되어야 한다. 방대한 천체는 우주의 眞(쩐)ㆍ善(싼)ㆍ忍(런) 특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대법(大法)이 전해온 것은 그가 우주 중의 생명에 준 선천적 역사특성의 재현이다. 대법(大法)은 원용(圓容)한 것으로, 眞(쩐)ㆍ善(싼)ㆍ忍(런) 세 글자를 갈라놓아도 마찬가지로 眞(쩐)ㆍ善(싼)ㆍ忍(런)의 특성을 완벽히 갖추고 있다. 왜냐하면, 물질은 미시적인 물질로 구성되었으며 미시적 물질은 또 더욱 미시적인 물질로 구성되어 줄곧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진(眞) 역시 眞(쩐)ㆍ善(싼)ㆍ忍(런)으로 구성되었고, 선(善) 역시 眞(쩐)ㆍ善(싼)ㆍ忍(런)으로 구성되었으며, 인(忍)도 마찬가지로 眞(쩐)ㆍ善(싼)ㆍ忍(런)으로 구성된 것이다. 도가에서 진(眞)을 수련함이 어찌 眞(쩐)ㆍ善(싼)ㆍ忍(런)을 수련함이 아니겠는가. 불가에서 선(善)을 수련함이 또 어찌 眞(쩐)ㆍ善(싼)ㆍ忍(런)을 수련함이 아니겠는가. 사실 표면형식만 다를 뿐이다.

그럼 다만 선(善)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선(善)이 속인사회 중에 반영되면 일부 속인사회에 미혹된 속인은, 속인 중의 하나의 사회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이 모두 대법(大法)을 배우고 모두 선(善)을 주장한다면, 밖에서 침략하거나 전쟁을 발동하여 우리를 공격할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나는 『전법륜』 중에서 이미 인류사회의 발전은 천상(天象)의 연화(演化)에 이끌려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류의 전쟁은 우연하게 존재하는 것인가? 업력이 큰 지역, 인심(人心)이 나쁘게 변한 지역은 곧 불안정하다. 만약 한 민족이 진정으로 선량하다면 업력은 꼭 작을 것이며 또한 절대 전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大法)의 원칙이 허용하지 않으며 우주의 특성이 일체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선량한 민족이 침략을 받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주의 특성 ― 대법(大法)은 거시적인 것에서 미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전반 천체에 분포되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내가 오늘 전하는 대법(大法) 역시 단지 동방인에게만 전해주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또 서방인에게도 전해 주어야 하는 것으로, 그들 선량한 사람 역시 제도 받아야 한다. 다음 한 차례 역사의 신기원(新紀元)으로 들어가야 할 모든 민족은, 모두 법을 얻고 전체적으로 제고될 수 있기 때문에 한 민족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도덕수준 역시 인류의 본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李洪志
1996년 7월 20일

 

정성주해(正性注解)

내가 “법신과 法輪(파룬)은 독립적인 생명체가 아니다.”라고 말한 후, 어떤 수련생이 물었다. 『전법륜』 중에서 말한 “법신의 의식, 법신의 사상은 오히려 주체(主體)의 통제를 받는다. 그러나 법신 자신은 또한 완정(完整)하고 독립적이며, 확실하게 실재하는 개체의 생명이다.”와 모순되지 않는가? 내가 보건대 이것은 법을 잘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법신은 완전히 독립적인 생명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곧 주존(主尊)의 형상과 사상의 법력과 지혜의 여의(如意)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주존(主尊)의 의향에 따라 일체 일을 독립적으로 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수련생은 뒤의 한마디 말만 주의했을 뿐, 앞의 한마디 말 “법신의 의식, 법신의 사상은 주체의 통제를 받는다.”를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독립적이고 완정한 주존의 형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주존의 성격 특징을 갖고 있으며 또 주존이 생각하는 일체 일을 독립적으로 완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생명은 통제하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이 법신을 볼 때면 또 하나의 완정하고 독립적이며 확실하고도 확실한 개체의 생명이다. 사실 간단히 말하면, 나의 법신은 곧바로 나다.

李洪志
1996년 7월 21일

 

불성과 마성(佛性與魔性)

아주 높고 아주 미시적인 우주 사이에는 두 가지 부동(不同)한 물질이 존재한다. 이 역시 眞(쩐)ㆍ善(싼)ㆍ忍(런) 최고 우주특성이 우주의 일정한 공간 층차에서 체현되어 나온 두 가지 물질 존재 형식이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미시적인 데서 거시적인 데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공간을 관통한다. 더욱 아래로 내려갈수록 두 가지 성질의 물질은 부동한 층차의 법의 표현 상태에 따라 표현이 같지 않으며 차이점이 더욱 크다. 그리하여 도가에서 말하는 음양(陰陽)과 태극(太極)의 이치가 생겼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두 가지 부동한 성질의 물질은 더욱더 대립하는데, 그러면 곧 상생상극의 이치를 형성한다.

상생상극이 있기에 곧 선(善)과 악(惡), 정(正)과 사(邪), 좋은 것(好)과 나쁜 것(壞)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럼 생명은, 부처가 있으면 마(魔)가 있고, 사람이 있으면 귀신(鬼)이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속인사회 중에서는 더욱 뚜렷하고 복잡하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이 있고, 공(公)적인 것을 위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私)적인 것을 위하는 사람이 있고, 흉금이 넓은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좁은 사람이 있다. 수련에 대해 말하자면, 믿는 사람이 있으면 믿지 않는 사람이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며, 지지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인류사회이다. 만약 모두 수련할 수 있고 모두 깨달을 수 있으며 모두 믿는다면, 인류사회는 곧 신(神)의 사회로 변할 것이다. 인류사회는 바로 인류사회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인류사회는 영원히 존재하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반대하는 것은 정상적이며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다. 귀신이 없다면 사람이 어떻게 사람으로 전생할 수 있고, 마(魔)의 존재가 없다면 부처로 수련할 수도 없으며, 쓴 것이 없으면 단 것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상생상극의 이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곤란이 있게 마련이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노력을 거쳐 곤란을 극복하고 하려는 일을 성사함으로써, 당신은 비로소 얻음이 쉽지 않음을 느끼며 당신은 비로소 얻은 것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고, 사람은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상생상극의 이치가 없이 무슨 일이든 하기만 하면 곧 성사된다면, 당신은 산다는 것이 무료(無聊)함을 느낄 것이고 행복감이 없으며 승리 후의 희열도 없을 것이다.

우주 중의 어떤 한 가지 물질과 생명이든지 모두 미시적인 입자에서 더욱 큰 한 층의 입자로 구성된 것이며 그리하여 표면물체로 구성되었다. 이 두 가지 부동한 성질의 물질이 관통된 범위 내에 일체 물질, 일체 생명은 모두 마찬가지로 두 가지 성질이 존재한다. 예컨대 강철은 아주 단단하지만 땅속에 묻어두면 녹이 슬어 산화되어 버리나, 도자기는 땅속에 묻어 두었다고 하여 산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취약하여 한 번 치기만 하면 곧 부서진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은 불성(佛性)이 있는 동시에 마성(魔性)이 존재한다. 사람이 도덕적 규범과 단속이 없는 가운데서 한 일은 곧바로 마성이다. 부처수련이란 바로 당신의 마성을 제거하고 당신의 불성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사람의 불성은 선(善)으로서, 자비로 표현되며 일을 함에 우선 남을 고려하고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사람의 마성은 곧 악(惡)으로서, 살생하고, 훔치고 빼앗고, 이기적이고, 사념(邪念)적이며, 시비를 걸고, 선동하며 요언을 날조하고, 질투하고, 악독하며, 발광하고, 게으르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등등으로 표현된다.

우주의 일정한 층차 중에서 이 두 가지 부동한 성질의 물질은 우주특성 眞(쩐)ㆍ善(싼)ㆍ忍(런)이 부동한 층차에서 부동하게 나타남에 따라 역시 동시에 부동한 층차 중에 부동한 표현형식이 있다. 더욱 아래로 내려갈수록 대립성은 더욱 뚜렷하다. 그리하여 좋고 나쁨의 구분이 있으며 선한 것은 더욱 선하고 악한 것은 더욱 악하다. 같은 물체의 두 가지 성질 역시 더욱 복잡하고 변화가 많다. 이것이 바로 부처가 말한, 만물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인데, 사실 마성도 함께 있다.

그러나 우주는 眞(쩐)ㆍ善(싼)ㆍ忍(런)을 특성으로 한 것이며, 속인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말한 이 두 가지 물질도 다만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미시적인 데서 거시적인 데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류사회에까지 무수하게 존재하며, 생명과 물질 중에서 두 가지 성질을 만들 수 있는 두 가지 물질을 반영했을 뿐이다.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류사회에 이르기까지 생명과 물질을 구성함은 무수한 각양각색의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의 물질로 구성된 것이다.

인류가 사람의 도덕규범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는 곧 큰 난(亂)이 일어나 다스리지 못하며 천재인화(天災人禍)가 일어난다. 수련자가 마성을 닦아 제거하지 않으면, 공(功)이 크게 난잡해져 얻지 못하거나 마도(魔道)로 들어간다.

李洪志
1996년 8월 26일

 

대폭로(大曝光)

현재 많은 수련생이 원만(圓滿)하였거나 곧 원만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수련 성취하여 원만하는 이것은 얼마나 엄숙한 일인가. 세간(世間)에 이보다 더욱 수승(殊勝)하고 더욱 장려(壯麗)하며 더욱 위대한 일은 없다. 이렇다면 수련과정 중에서 반드시 매 수련자에게 엄격히 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매 층차를 제고함도 착실하고도 착실하게 표준에 도달해야 한다. 전반적인 상황에서 볼 때, 대법(大法) 수련제자들은 합격이다. 하지만 각종 집착심을 버리지 않고 그럭저럭 지내는 사람도 있다. 겉으로는 대법(大法)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수련을 하지 않고 있다. 특히 전반적인 사회 여론이 좋을 때에는 모두 대법(大法)이 좋다고 말하는데, 사회의 상층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좋다고 말하고, 어떤 정부도 좋다고 말하는가 하면, 여러 사람도 모두 따라서 좋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진심인가? 어떤 사람이 따라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입으로는 좋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파괴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속인사회의 형세를 개변하여 전반적인 사회여론이 반대로 된 형세하에서, 누가 여전히 대법(大法)이 좋다고 하는지, 누구의 심태(心態)가 변화하는지를 보기만 하면, 단번에 다 드러날 것이 아닌가?

<광명일보(光明日報)> 사건 이후부터 줄곧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법제자는 사람마다 모두 역할을 맡았다. 견정하고 착실하게 수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법(大法)의 명예를 위해 직언상서(直言上書)하는 사람이 있고, 무책임한 보도를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또 이런 어려운 형세하에서 안으로 수련하지 않고 분열을 일으키며 당면 형세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또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손해 볼까 두려워 수련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또 대법(大法)의 안정을 돌보지 않고 사실이 아닌 골목 소식을 전하여 난법의 요소를 가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각지의 일부 책임자들은 장기적인 정치투쟁 중에서 양성된 사회동태를 보는 불량한 습관으로 대법(大法)의 형세를 분석하고 각 지역의 개별적인 문제를 모두 하나로 연계하여 그 무슨 사회의 동향이 나타났다고 인식하며 또 의식적으로 수련생들에게 전달해 주는 사람도 있다. 비록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이것보다 더욱 심하게 대법(大法)을 파괴하는 것이 있겠는가? 더욱 심한 자는 마성을 갖고 요언을 날조하고 사건을 일으키며 난이 일어나지 않을까 봐 걱정한다.

대법(大法)은 우주적이며, 속인사회 속까지 관통한다. 이렇게 큰 법을 전함에 일체 모든 것을 배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발생한 일은 대법제자의 心性(씬씽)을 고험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이 수련인가? 당신이 좋다고 말하고, 내가 좋다고 말하며, 여러 사람이 다 좋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보아 낼 수 있겠는가? 바로 관건적 시각에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아야 한다. 일부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부처마저도 감히 팔아먹을 수 있을 것인즉, 이것이 작은 문제인가? 어떤 사람은 두려워하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제자들이여! 당신들은 내가 한, 한 사람이 나한(羅漢)으로 수련 성취했을 때, 마음속에 두려운 생각이 생겨 떨어져 내려오게 되었다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 어떤 속인의 마음이든지 다 버려야 한다! 어떤 제자는 말하기를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머리가 떨어져도 몸은 여전히 가부좌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비교해 보면 수련함이 어떠한가가 일목요연(一目了然)하다. 물론 어떤 책임자는 대법(大法)의 안전을 위해 걱정하는데, 이것은 별개의 일이다.

우리는 바로 수련에 정진하지 못하는 그러한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을 보게 하고, 그럭저럭 지내는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표현해 내게 하며, 다른 형식으로 대법을 파괴하는 그러한 자들로 하여금 드러나게 하고, 진수(眞修) 제자들로 하여금 원만하게 한다.

李洪志
1996년 8월 28일

 

수련은 정치가 아니다(修煉不是政治)

일부 수련생은 사회에 대하여, 정치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으며, 이런 강렬한 집착심을 품고 놓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 대법(大法)을 배우고, 우리 대법(大法)을 이용하여 정치에 참여하려고까지 망상한다. 이것은 부처를 모독하고, 법을 모독하는 더러운 심리행위이다. 만약 이 마음을 제거해 버리지 않는다면, 절대로 원만할 수 없다.

나는 강의 중에 거듭 강조하였다. 속인사회의 형식은 그것이 어떤 사회와 정치든지 모두 정수(定數)가 있으며 하늘이 정해 놓은 것이다. 수련하는 사람은 자기와 상관없는 세상일을 상관할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정치투쟁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에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그것은 수련인의 마음을 고험(考驗)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정치를 하는 데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대법(大法)을 수련하는 형식은 바로 이런 것이며,  어떤 국내 국외의 정치세력에도 의탁하지 않는다.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수련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우리 대법(大法)의 어떤 명예적이거나 실질적인 책임자를 맡을 수 없다.

제자들이여, 당신들은 우리가 진수(眞修)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속인의 명(名)ㆍ이(利)ㆍ정(情)을 내려놓는 것으로, 사회의 제도가 어떠하든지 당신들의 수련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집착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련해야만 비로소 원만할 수 있다! 한 수련자로서 본래 직무의 일을 잘하는 외에 정치ㆍ정권에 대해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하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나의 제자가 아니다.

우리는 수련자로 하여금 법을 얻고 정과를 얻게 할 수 있다. 또 사회에서 인심이 선(善)을 향하게 할 수 있으며, 인류사회의 안정에 좋은 점이 있다. 하지만 대법(大法)을 전함은 인류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수련하여 원만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李洪志
1996년 9월 3일

 

책임자 역시 수련인이다(負責人也是修煉人)

우리 각지의 소장은 모두 대법(大法)을 위해 고생을 마다치 않고 원망함이 없이 일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소장이 소장과 소장 사이의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하며 일 처리에서 협조하지 못하여 사람들 마음속에서 대법(大法)의 형상에 아주 큰 손실을 주게 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일 처리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 아닙니까?”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은 속인의 견해라고 한다. 관건적 원인은 당신들 소장, 부소장 역시 수련하는 사람이며 역시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심이 있으므로 반드시 당신들의 그 마음을 제거하는 하나의 환경이 있어야 한다. 소장과 소장 사이에 모순이 나타났을 때 당신들은 흔히 모두 “일 처리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등등 대법(大法) 일을 구실로 삼아 모순을 밀어 놓기만 하고,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해 안을 향해 찾으며 제고하여 올라가려 하지 않는다. 당신의 마음을 제거해 버리지 못했는데, 제고하지 못했으면 다음번에 모순이 또다시 올 수 있으며, 이러면 정말로 대법(大法) 일을 교란하게 된다. 당신들은 아는가? 당신들 소장 사이의 모순은 내가 당신이 제고하도록 배치한 것인데, 당신은 오히려 대법(大法) 일로 당신이 마땅히 제고해야 함을 덮어 감춤으로써 도리어 제고해야 할 마음을 얻지 못했다. 모순이 커지고 고비를 넘지 못할 때 당신은 또 사상 중에서 나에게 고달픔을 하소연하는데, 그때 당신은 내가 어떤 생각인지 아는가? 당신이 대법(大法) 일을 위해 소장직을 맡았다 하여 心性(씬씽)을 제고하지 않고도 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련생들은 모두 어떠한 모순 중에서도 心性(씬씽)을 제고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는데, 소장은 왜 할 수 없는가? 모순이 오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위로 제고하게 하려는 것으로서 당신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안 되며, 대법(大法) 일 역시 당신이 心性(씬씽)을 제고할 좋은 기회이다!

왜 나는 당신들을 위해 전문적으로 이 한 편을 썼는가. 왜냐하면, 당신들의 일거일동(一擧一動), 일언일행(一言一行)은 수련생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자신이 수련을 잘했다면 그 한 지역의 법을 널리 잘 전할 수 있으며, 수련생들은 더욱 잘 수련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법을 손상하게 마련이다. 당신들은 속인 이 한 층 중에서 대법(大法)의 엘리트(精英)들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로 하여금 일만 하게 하고 당신들이 원만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李洪志
1996년 9월 3일

 

무엇이 수련인가(何爲修煉)

수련이라 하면 많은 사람이 일부 동작이라든가 가부좌를 좀 연마(練)하고 주문을 좀 배우기만 하면 수련하는 것으로 여기며 가히 신(神)이 되고 부처(佛)가 되며 도(道)를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 사실 이것은 수련이 아니며 세간(世間)의 기능을 연마(練)함에 불과하다.

그래서 종교 중에서는 닦음(修)을 아주 중요시하여 수행(修行)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극단으로 들어갔다. 출가한 사람들은 경서 읽기에 노력하고 경서를 얼마나 장악했는가를 가지고 원만하는 방법으로 삼았다. 사실 노자를 포함하여 석가모니부처, 예수가 세상에 있을 때는 경서가 전혀 없었으며, 오로지 착실하게 수련할 뿐이었다. 또한 사존(師尊)이 한 말은 수련을 지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세사람들은 그들이 한 말을 회억하여 책으로 썼으며, 경서라고 이름 지어 서서히 불학(佛學), 법학(法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존(師尊)이 세상에 있을 때와 같이 진정으로 착실히 수련하고 그들이 말한 법을 착실한 수련의 지도로 삼는 것이 아니라, 종교 경전과 학문을 학습함을 수련으로 삼았다.

이것은 역사적인 교훈이다. 法輪大法(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제자들은 꼭 기억해야 한다. 절대로 법을 속인이나 출가한 사람의 학문연구로만 간주하지 말고 착실하게 수련해야 한다. 왜 나는 당신들에게 『전법륜』을 배우고, 읽으며, 기억하라고 하는가? 목적은 당신들의 수련을 지도하려는 것이다! 동작만 연마(練)하고 법을 배우지 않는 그런 사람은 절대 대법제자가 아니다. 오로지 법을 배우고 마음을 닦으며 아울러 원만하는 수단 ― 연공(煉功)을 하여 확실하게 본질에서 자신을 개변하면 心性(씬씽)이 제고되고 층차가 제고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수련이다.

李洪志
1996년 9월 6일

 

대법(大法)은 금강처럼 영원히 순수하리라(大法金剛永純)

종교와 정치는 하나로 합칠 수 없는 것으로, 그 수령(首領)은 필연코 세간 속세의 일에 속 태우게 마련이다. 입으로는 인심이 선(善)을 향하고 정토(淨土)로 회귀(回歸)하기 위해서라 말하지만, 마음은 필연코 사악하고 위선적이라, 구하고자 하는 것은 필연코 명(名)과 이(利)이다. 권력은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고, 명(名)은 원만하지 못하게 하는 강대한 저애다. 오래되면 그 사람은 필연코 사교(邪敎)의 수괴(魁首)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의 목적은 사람이 선을 향하도록 가르쳐 최후에는 천국 세계로 되돌아가게 한 것으로, 말하는 법리는 반드시 인류사회의 이치보다 높다. 만약 세간의 정치에 사용한다면 가장 심하게 천법(天法)을 패괴시키는 것이다. 신불(神佛)이 어찌 사람의 집착심에 이끌려 속인사회의 더러운 정치와 권력투쟁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이는 사람이 마성에 이끌려 하는 짓이다. 이러한 종교는 반드시 정부에게 이용되어 폭력에 참가하고 종교전쟁을 일으킬 것인즉, 그리하여 사교(邪敎)로 되어 인류를 해친다.

‘전민종교(全民宗敎)’ 역시 안 된다. 첫째, 종교의 교의(敎義)를 개변하여 속인사회의 이론으로 만들기 쉽다. 둘째, 정치도구로 변하여 불법형상(佛法形像)을 패괴시키기 쉽다. 셋째, 종교 수령은 정객(政客)이 되어 종교를 말법으로 나아가게 하며 그리하여 사교(邪敎)를 만든다.

法輪大法(파룬따파)는 종교가 아니지만, 장래의 사람들은 종교라고 인식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목적은 수련하기 위해서이며 종교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법(大法)을 배우는 사람은 아주 많을 것이나, 국민을 모두 교인으로 만들어 사람마다 모두 통일적인 수련활동에 참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대법(大法) 수련은 영원히 자유로운 것이므로, 어떠한 사람이든지 억지로 끌어서 수련에 참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장래에 어떠한 시기든지 모두 절대로 어떠한 정치에도 이용당할 수 없다. 대법(大法)은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선을 향하게 할 수 있으므로 사회가 안정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법(大法)은 속인사회의 이러한 것을 수호하기 위해 전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제자들은 잘 기억하라. 장래에 얼마나 큰 정치와 권세(權勢)의 압력이 있든지 역시 정치 권세에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

영원히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국사(國事)에 간섭하지 않으며 진수(眞修)하여 선(善)을 향해야 한다. 대법(大法)은 순결불변(純潔不變)을 유지하고, 금강불파(金剛不破)하여 영세(永世)토록 길이 남을 것이다.

李洪志
1996년 9월 7일

 

재인식(再認識)

불성(佛性)과 마성(魔性)의 문제를 나는 이미 더없이 명백하게 말했다. 사실 당신들이 넘은 고비는 바로 당신들의 마성을 제거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한 차례 한 차례씩 각종 구실 또는 대법(大法)으로 덮어 감추어 지나갔으며 心性(씬씽)을 제고하지 못했고 한 차례 한 차례씩 기회를 놓쳤다.

당신들은 아는가? 오로지 당신이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환경, 어떤 상황하에서든지 부닥칠 수 있는 그 어떤 시끄러움과 좋지 않은 일, 나아가 당신들이 대법(大法) 일을 위해 더없이 좋고 더없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일까지도, 나는 모두 당신들의 집착심을 제거해 버리고 당신들의 마성을 폭로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데 이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의 제고만이 제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렇듯 제고해 올라와서 당신들이 순정(純淨)한 심태에서 한 일이야말로 가장 좋고 신성한 일이다.

李洪志
1996년 9월 9일

 

경고하는 말(警言)

내가 대법(大法)을 전한 지 이미 4년이 되었다. 일부 수련생은 心性(씬씽), 경지를 제고함이 아주 느리며 아직도 감수 상에 머물러 나와 대법(大法)을 인식하고 있으며, 늘 신체적 변화와 공능의 체현에서 나에게 감지덕지하는데, 이것은 속인의 인식이다. 당신들이 사람의 상태를 개변하고 이성(理性)적으로 대법(大法)에 대한 진정한 인식으로 승화하려 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곧 기회를 잃을 것이다. 당신들이 속인의 그 천백 년 이래 뼛속에 형성된 사람의 이치를 개변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사람의 표면적인 이 한 층의 껍데기를 벗어버릴 수 없으며 원만할 수 없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법에서 제고하지 않고 사람의 인식, 사람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내가 늘 당신들에게 업을 없애 줄 수는 없다. 당신들이 나와 대법(大法)을 대하는 사고ㆍ인식ㆍ감격 방식에서도 모두 속인의 사유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바로 속인에서 뛰쳐나오는 것이다! 이성(理性)적으로 대법(大法)을 진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수련 중에서 당신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착실하고도 착실하게 제고함으로써 내재적으로 거대한 본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힘에 의거하고 외재적인 강대한 요소의 도움을 빌린다면, 이는 영원히 당신 사람의 본질을 불성(佛性)으로 전변시킬 수 없다. 만약 당신들이 사람마다 모두 내심에서 법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위력이 끝없는 법의 체현 ― 인간 세상에서 강대한 불법(佛法)의 재현(再現)이다!

李洪志
1996년 9월 10일

 

대법(大法)은 훔칠 수 없다(大法不可竊)

제자들이여! 내가 대법(大法)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은 이미 사람에 대한 최대의 자비임을 거듭 말하는 바이다. 이것은 억만년이 되도록 여태껏 있어본 적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소중히 여길 줄 모르며, 또 어떤 사람은 법 또는 동작을 고친 후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거나 그들 민족이나 그들 국가의 어떤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생각해 보라! 당신들이 괜찮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이 집착하는 이익을 위하거나 또는 당신들 민족을 위해 어떻게 하려는 등등인데 이것은 속인의 인식이다. 만약 속인사회의 어떤 것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괜찮다. 그러나 이것은 속인의 것이 아니다! 당신들 민족을 어떻게 하려고 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주의 대법(大法)이며 불법(佛法)의 근본이다! 사람에게 전해 주는 것은 사람을 제도하기 위한 것인데, 당신이 이렇듯 큰 법을 고친단 말인가? 조금만 고쳤다 해도 이미 하늘에 사무친 큰 죄다. 당신들은 절대 속인사회를 어떻게 하려는 집착을 위해 사념(邪念)을 움직이지 말라! 지극히 위험하다!

당신들은 아는가? 이 몇 년 사이에 어떤 수련생은 갑자기 죽어버렸다. 그중 일부는 바로 이렇게 했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 사부가 당신들을 어떻게 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각 층차에 무수한 호법신(護法神)이 있으며 그들의 직책이 바로 법을 수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마(魔)도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전 세(世)에 빚진 업력은 정법을 수련하기에 피했으나 당신이 일단 속인으로 떨어졌을 때에는 당신을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으며 마(魔)도 당신의 명(命)을 가져갈 수 있다! 곧 다른 불(佛)ㆍ도(道)ㆍ신(神)에게 보호해 달라고 빌어도 소용이 없으며 그들은 법을 어지럽힌 사람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업력 또한 당신의 몸에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사람이 수련하기는 어려우나 떨어져 내려가기는 너무나 쉽다.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거나 내려놓지 못하면 반면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으로, 역사적인 교훈이 매우 많다. 떨어져 내려왔을 때에야 비로소 알고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다.

李洪志
1996년 9월 22일 방콕에서

 

무엇이 개오인가(何爲開悟)

개오(開悟)를 또 혜오(慧悟)라고도 하는데 우리 대법(大法)에서는 개공(開功)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여 한 사람이 이미 수련하여 원만하였고 모든 수련과정을 완성했으며 곧 천국 세계로 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개오(開悟) 후의 각자(覺者)는 어떤 상태인가? 부처로 수련 성취했으면 이미 부처이고, 보살로 수련 성취했으면 이미 보살이며, 나한으로 수련 성취했으면 이미 나한이다. 또한 도(道)를 닦는 사람은 이미 도를 이루었다. 신(神)으로 수련 성취했으면 이미 신이다. 일부 각자(覺者)는 원만한 후에 아직도 반드시 속인사회에서 일부 일을 하거나 일부 소원을 끝마쳐야 하므로 아직도 속인 중에서 한동안 생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속인 중의 생활은, 그들로 말한다면 몹시 어려운 것이다. 그들과 속인의 사상 경지의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속인의 사상 속에 생각하는 일체는 모두 강렬한 집착과 이기적이고 더러우며 사람을 타산하는 따위의 사념(邪念)임을 그들은 모두 똑똑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수천수만 사람의 미세한 사상 활동을 알고 있다. 게다가 속인사회는 곳곳에 모두 업력(業力)과 병독(病毒)이며 또 사람이 모르는 많고도 많은 좋지 않은 것들이 공기 중에 흩어져 있는데 그들은 아주 똑똑히 다 보아낼 수 있다. 현재 말겁 시기 인류사회의 업력은 대단히 크다. 사람은 호흡 중에서도 모두 대량의 업과 병독, 독기(毒氣)를 흡입하고 있다. 이 속인세계는 그들로 말한다면 남아 있기가 실로 어렵다.

그럼 그들은 또 어떤 모양인가? 이 역시 이것에 집착하는 그런 수련생이 추측하는 점이다. 당신들은 이 사람이 개오한 것 같고 저 사람이 원만한 것 같다고 보지 말라. 마음을 정진실수(精進實修) 하는 데에 써서 역시 빨리 원만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볼 것이 뭐 있는가? 사실 그런 개오한 사람은 흔히 모두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 조용히 실속 있게 수련하는 제자로서, 나이가 다양하고 보기에는 보통사람과 별다른 점이 없는데, 아마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비록 일체 신통(神通)과 변화를 모두 갖추었으나, 사람은 원래 저급한 작은 생물과 마찬가지라, 그를 위해 한 번 써 볼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또 사람이 보면 사람의 각종 저능한 인식 염두가 일어나 사람의 환희심으로 집착하게 되므로 각자(覺者)들로 하여금 견뎌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속인은 불법신통(佛法神通)이 가진 진정으로 위대한 내포 의미를 요해(了解)하기 어렵다.

지금 참견하기를 좋아하고 마음을 정진함에 두지 않는 일부 수련생들이 곳곳으로 다니며 누가 개오했는가 하는 따위를 찾고 있다. 당신들이 생각해 보라. 개오한 각자(覺者)인 그는 이미 부처이며 부처의 일체를 갖췄는데, 함부로 사람들에게 알게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부처를 알겠는가? 당신들이 곳곳에서 그들을 찾을 때 집착심, 호승심(好勝心), 과시심, 참견하려는 마음, 호기심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으며 동시에 또 안심하고 수련하는 수련생들을 교란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어떤 감수인지 당신들은 아는가? 그들로 말하면, 목적을 지닌 사람들의 일거일념(一擧一念)은 모두 그들을 괴롭게 할 수 있다!

지금 일부 수련생은 아주 높은 층차에서 법을 얻으러 왔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빨리 개오할 수 있다. 내가 수련생에게 2년의 수련시간을 준다고 말한 것은 이 부분 제자를 가리킨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법(大法)의 모든 제자는 착실한 수련 중에서 층차를 제고함이 확실히 아주 빠르며, 매우 많은 사람이 아주 빨리 개오할 수 있다. 이는 과거 수련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었다. 여러분들이 안심하고 끊임없이 정진하며 꾸준히 견지할 것을 희망한다. 한 사람이 원만하면 나는 한 사람을 받아 보낼 것이다.

李洪志
1996년 9월 26일

 

인류를 다시 만들다(再造人類)

사람이 인식하는 현실은, 역사 발전에 대한 사람의 어리석은 소견과 실증과학(實證科學)이 조성한 가상(假相)이다. 우주 중의 그 위대한 현실의 진실한 체현이 아니다. 진정한 현실은 필연코 새로운 과학, 새로운 인식을 가져올 것이다. 우주의 법리는 장차 인간 세상에서 재현될 것이다.

인간의 이기ㆍ탐욕ㆍ우매(愚昧)ㆍ무지와 인간의 선량한 본성이 한데 뒤섞여 무지하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체를 만들면서 바야흐로 사회를 삼키고 있다. 세계적으로 각종 사회문제가 나올 대로 나오고 곳곳에 위기가 잠복해 있다. 인류는 자신의 본성에서 원인을 찾을 줄 모르고 도덕이 부패한 후의 무서운 인심이야말로 사회문제의 독근(毒根)임을 보지 못하며, 늘 어리석게도 사회의 표면적인 현상에서 출로를 찾는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자신에게 만든 일체, 이른바 출로(出路)란 바로 인류가 자신을 봉폐시키는 것이고, 따라서 더욱 출로가 없고 이에 따라 나온 새로운 문제는 더욱 잘못된 것임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렇게 되어 몹시 어렵게 또 조그마한 공간을 찾아내고 이에 따라 새로운 조치를 하므로 남았던 이 조그마한 공간을 또다시 봉폐시킨다. 오래 되풀이하면 포화상태에 이르러 더는 출로가 없어, 봉폐된 이외의 진상을 보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이 만든 일체를 감당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에 대한 우주의 최종적인 도태방식이다.

주불(主佛)의 자비는 홍대(洪大)한 것으로 이미 불법(佛法)을 사람에게 남겨주었다. 우주는 다시 사람에게 한 차례의 기회를 줄 것이다. 위대한 불법(佛法)이 인간 세상에서 우주의 진정한 현실을 재현하게 하여, 일체 더러운 것과 어리석은 소견을 쓸어버리고 인류의 언어로 하여금 다시금 휘황을 이루도록 할 것이다. 소중히 여기라! 불법(佛法)은 바로 당신들 앞에 있다.

李洪志
1996년 9월 28일

 

변이(變異)

성직자들의 부당한 행위가 정결(貞潔)한 서약을 완전히 위반함으로 말미암아 신(神)의 부탁이 한 푼의 가치도 없게 변하여 인류와 신(神)을 모두 깜짝 놀라게 하였다! 선량한 사람들은 줄곧 그들을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의뢰자로 간주해 왔으나, 실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더 종교를 믿지 않게 했으며 최후에는 신(神)에 대한 신심(信心)을 완전히 상실하게 했다. 그리하여 아무 거리낌 없이 나쁜 짓을 다 한다. 오늘까지 발전하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완전히 마성이 크게 드러난 변이인(變異人)으로 변했고, 뭇신(衆神)들로 하여금 사람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게 했다. 이것이 바로 신(神)이 무엇 때문에 더는 사람을 상관하지 않는가 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李洪志
1996년 10월 10일

 

불성무루(佛性無漏)

나는 법 중에서 석가모니교의 경서와 말법의 출현을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다. 주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말, 자신의 인식을 불법(佛法) 중에 섞어 넣음으로써 조성된 것으로,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교훈이다. 그러나 어떤 제자는 속인의 마음이 제거되지 않아 말재주, 글재주를 과시하려는 마음에 집착하여 마성에 이용당하고 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법(佛法)을 파괴하고 있다.

최근 한동안 어떤 사람은 늘 수련생이 수련 중에서 인식을 제고한 후, 심득체험을 담론할 때 이전에 자신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을 ‘더러운 물 쏟기’라고 함으로써, 수련의 내포를 완전히 개변했다. 수련이란 신성(神聖)한 것이며 이는 속인의 반성과 참회, 이런 유의 일이 아니다. 제자들이여! 당신들은 제멋대로 하나의 어떤 용어를 가져와 여러 사람이 다 사용하고 다 말하게끔 할 수 없다. 이것은 곧 대법(大法) 중에 사람의 것을 섞어 넣는 게 아닌가? 작년 북경 보도소에서 네 마디 말을 했으며, 나는 바로 이 때문에 ‘시정(糾正)’이라는 문장을 썼는데, 마땅히 중시해야 했다. 물론 아직도 기타 난잡하기 그지없는 일부 용어를 역시 전하고 있다. 당신들이 생각해 보라. 오늘 한 단어를 가하고 모레 한 단어를 가하여 오래되고 오래되면 다음 세대 제자들은 누가 말한 것인지 분간하지 못하여 서서히 대법(大法)을 개변할 것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내가 당신들에게 남겨 준 수련형식을 개변할 수 없다. 내가 하지 않는 것을 당신들은 하지 말고, 내가 사용하지 않는 것을 당신들은 사용하지 말며, 내가 수련 중에서 어떻게 말했다면 당신들은 곧 그렇게 말하도록 하라. 주의하라! 자신도 모르게 불법(佛法)을 개변함도 마찬가지로 불법(佛法)을 파괴하는 것이다!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

李洪志
1997년 2월 13일

 

청성(淸醒)

현재 각지 소장의 일 처리 방법 문제를 좀 말해야겠다. 총회(總會)의 요구를 집행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나는 늘 말했다. 만약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티끌만큼도 자신의 목적과 인식이 없다면, 한 말은 상대방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고. 나는 단지 당신들에게 대법(大法)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나의 작풍(作風) 역시 당신들에게 남겨놓은 것이다. 일 처리 중의 어투, 선한 마음, 도리(道理)를 더하면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킬 수 있으나 명령은 영원히 할 수 없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불복하고 겉으로만 복종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보지 않을 때는 여전히 자기 뜻대로 일을 처리할 것이다.

대법(大法)의 어떠한 일도 모두 사람이 법을 얻게 하기 위함이고 제자의 제고를 목적으로 하는바, 이 두 가지를 제하고는 모두 의의가 없다. 그래서 어떠한 활동이든지 모두 현지와 수련생의 상황에 근거하여 해야 하며 절대화는 안 된다. 대법(大法)을 공부하는 것도 다 자원(自願)적인데 하물며 활동에서랴! 사실 소장은 우선 법 공부에 앞장서는 사람이어야 하며 자신이 법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대법 일을 잘할 수 없다. 각지 보도소의 심득교류회를 절대 반성회로 만들 수 없다. 대법(大法) 수련체험을 담론하는 이렇듯 엄숙한 ‘법회’를 절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전시회로 만들 수 없다. 더욱이 수련생에게 강제로 속인이었을 때의 결점과 착오를 말하게 함으로써 부정적이고 막대한 영향을 조성하여 대법(大法)의 명예를 훼손하게 할 수 없다. 당신들은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엄숙한 수련이다! 심득교류회는 수련생의 제고와 대법(大法)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지, 우리의 수련생이 이전에 어떻게 좋지 않았다는 것을 선전하는 것이 아니며, 대법(大法) 수련을 말하는 것이지, 그 무슨 더러운 물 쏟기가 아니다! 당신들이 대법(大法)에 한 일은 당신들 본인의 수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일 중에서 곳곳마다 모두 당신들 心性(씬씽) 제고의 요소가 그 안에 들어 있다. 당신들은 다만 일만 할 수 없으며 역시 원만해야 한다. 나는 당신들 소수 사람이 책을 적게 보고 법 공부를 적게 하며, 내가 당신들에게 쓴 몇 편의 경문(經文)이라고 일컫는 것도 여태껏 자신에게 대조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무엇을 경문이라고 하는가? 바로 늘 보는 글인데, 당신들은 보는가? 법을 좀 많이 배운다고 일을 잘못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당신들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것은 대법(大法)으로 하여금 건강하게 발전하며 문제가 적게 나타나게끔 하려는 것이다. 사실 대법(大法)도 당신들의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으며 대법(大法)의 엘리트를 육성하고 있다.

李洪志
1997년 6월 13일 홍콩에서

 

영원히 기억하라(永遠記住)

대법학회(大法學會):

내가 보건대 제자들이 제 나름대로 전한 모든 것과 내가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것은 당장 즉석에서 소각하는 것이 좋겠다. 예컨대, 승덕(承德)에서 전해 나온 무슨 나의 강의, 북경 수련생이 말한 무슨 공능(功能)의 것, 대련(大連) 소장의 강의와 귀주(貴州) 보도소장이 말한 산굴의 일과 기타 강의, 각지 책임자의 강의와 수련생이 나를 만난 후에 말한 어떤 것, 또 대법 총회(總會) 책임자가 한 말 등등과 또 제 나름대로 정리한 나의 발언고, 녹음, 비디오 따위를 몽땅 전부 즉석에서 소각해야 하며 어떤 구실로도 남길 수 없다. 무엇이 대법(大法)을 수호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한 차례 가장 철저한 대법(大法) 수호이며, 제자가 나의 말대로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나의 제자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것이다! 나는 또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겠다. 석가모니부처가 말한 법은 바로 이렇게 파괴된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교훈이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대법(大法) 각 지역 책임자 또는 어떤 제자가 한 말을 녹음하거나 비디오를 찍을 수 없으며, 더욱이 문자로 정리하거나 서로 전하여 보게 할 수 없다. 이는 어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며 또 어느 한 사람을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大法)을 수정(修正)하는 것이다. 대법(大法) 수련생의 법학습교류회와 총회(總會)에서 동의한 각지 총보도소의 활동을 제외하고, 대법(大法) 중에서 유전되고 있는 대법(大法)의 것이 아닌 어떠한 것도 모두 대법(大法)을 파괴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李洪志
1997년 6월 18일

 

맹격일장(猛擊一掌)

더욱 많은 사람을 수련하게 하려고 대법(大法)은 현재 속인사회 중에서 수련하는 것을 주로 채택하여 직장에서 또는 기타 속인 환경 중에서 연마(魔煉)하고 있다. 오로지 출가인만이 행각한다. 그러나 현재 일부 사람은 대법제자란 허울을 쓰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유 없이 수련생 집에 거주한다. 먹고, 마시고, 갖고, 달라고 하며 사기 치고 수련생의 선량한 일면을 이용해 대법(大法)의 틈을 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수련생은 왜 똑똑히 분별하지 못하는가? 수련은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다. 왜 이런 사람이 자기 집에서 안심하고 착실히 수련하지 않는지 생각해 보라. 환경이 좋지 못하므로 더욱 수련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사람은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왜 수련생의 것을 먹고, 갖고서도 오히려 수련생에게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하는가. 이것은 내가 그에게 가르친 것인가? 더욱 심한 자는 수련생 집에 거주하기만 하면 몇 달인데, 이것은 버젓이 수련생의 수련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생각하건대, 이런 사람은 반드시 사기 쳐서 먹고 가져간 것을 원래대로 배상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법(大法)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또 이런 상황이 있으면 속인 중의 사기꾼으로 대하여 경찰에 신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절대 우리 수련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일부 지역에선 자기 나름대로 무슨 설법 팀을 조직하여 각지 수련생 중에서 사기를 치는가 하면, 또 개인적인 강연을 요청하여 수련생의 수련을 파괴하고 교란하는 것이 있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마치 법을 선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들 자신을 선전하고 있다. 수련생은 모두 나의 법신이 계통적으로 배치하여 수련하고 있는데, 다만 일부 수련생이 깨우치지 못했거나 느끼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럼 그들이 교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특히 방금 법을 공부해 시간이 길지 않은 그런 사람은 똑똑히 분별하기가 몹시 어렵다. 어떤 사람은 또 몇천 명의 모임에서 무슨 강연을 하는데 말한 것은 모두 그 자신이다. 심지어 대법(大法)의 그 한 구절 말에 정의(定義)를 내리거나 대법(大法)을 해석하는데, 신체는 수련생들에게 검은 업력과 집착하는 물질을 발산하고 있다. 나는 『전법륜』에서 이미 명확하게 이렇게 하지 못하게 했는데 당신들은 왜 생각해 보지 않는가. 특히 안내와 요청을 책임지고 이런 일을 한 책임자들, 당신들은 아마 대법제자에게 일정한 무형적인 해를 조성했을 것인즉, 더는 대법제자의 책임자가 될 자격이 없다.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대법(大法)의 요구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나의 제자일 수 있는가? 이것은 대법(大法)과 맞서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파괴가 아니고 무엇인가? 제자들이여! 당신들은 늘 내가 이런 일을 지적해서야 당신들이 비로소 인식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법 중에 모두 있다. 무엇 때문에 책을 많이 보지 않는가? 나는 건의한다. 사람마다 모두 마음을 내려놓고 내가 쓴, 당신들이 경문이라고 일컫는 『정진요지』를 열 번 보도록 하라. 마음이 조용하지 않으면 법 공부를 해도 쓸데없는 것이라, 마음을 조용히 하고 배우도록 하라.

우리 소수 지역의 책임자는 책을 보지 않고 법 공부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법을 보기만 하면 골치가 아프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魔)의 교란이 있음에도 스스로 통제를 벗어나려 하지 않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 문제는 신 수련생마저도 인식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사람이 여전히 대법(大法)의 책임자가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가장 좋기는 이런 사람이 스스로 일반 수련생이 되고, 조용하게 한동안 착실히 수련하는 것이 대법(大法)에 대해서나 본인에 대해서도 모두 좋은 점이 있다. 어떤 사람은 또 내가 그녀를 비평한 편지를 반면으로 이해하고, 깨우치지 못한 채 복사하여 나누어주며 소문을 퍼뜨리기를, 스승님마저도 나에게 편지를 보내온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수련생이 지휘에 복종하게 하려고, 말할 때 늘 “나는 리(李) 스승님을 대신하여” 따위의 말을 한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당신들이 한 말이 내가 한 말로 될 수 있는가? 내가 한 말은 법인데, 당신들이 하는 말은 법인가? 제자여! 내가 건의하건대 당신은 우선 한동안 보통 수련생이 되었다가 청성(淸醒)해지기를 기다려 다시 일하도록 하라. 책임자는 그가 속인 중에서 얼마나 일을 했든지, 모두 대법(大法)을 위해 자원해서 일하는 것이다. 일의 성공은 다만 속인 중의 표현형식일 따름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법을 얻고 대법(大法)을 널리 전하게 하는 것은 대법(大法) 자체의 위력(威力)과 법신의 구체적인 배치이다. 나의 법신이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널리 전함을 말하지 않더라도, 바로 책임자 자신의 보장마저도 얻기 어렵다. 그래서 늘 자신이 어떠어떠하게 대단하다고만 생각하지 말라. 대법(大法)은 명예가 없고 이익이 없으며 벼슬할 것이 없는바, 바로 수련이다.

李洪志
1997년 6월 18일

 

가늠하는 표준을 다시 논함(再論衡量標準)

최근에 신수련생이 대단히 많은데 대법(大法)의 요구에 대해 아직 깊은 이해가 없다. 특히 일부 지역의 대법(大法) 책임자 역시 신수련생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법을 깊이 배워 일체 행위가 모두 대법(大法)에 부합하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각 지역 총보도소는 반드시 사람을 선택함에 아주 주의해야 한다. 수련생을 이끌어 함부로 하는 사람은 제때에 바꾸어야 하며 대법(大法)을 잘 배운 그런 제자가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최근에 어떤 보도소에서 이른바 천목이 열린 사람에게 수련생의 수련상황을 보게 했는데, 사실 이런 사람이 본 것은 모두 가상이다. 나는 일찍이 말했다. 사람을 가늠하는 표준은 제자의 心性(씬씽)을 보아야 한다고. 아울러 나는 절대 어떠한 개오(開悟)하지 못하고 원만하지 못한 사람이 내 제자의 진실한 수련상황을 똑똑히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주 낮은 층차에서 그의 그 한 층차에서 나타난 것을 보았을 뿐이며 그는 더 높은 것은 볼 수 없다. 만약 책임자가 그를 이용해 수련생을 본다면, 그 사람은 곧 과시심이 일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성적인 일면 역시 교란, 파괴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은 마음에 따라 변화(隨心而化)한 것일 수 있다. 그 사람이 대법제자를 보는 자체가 바로 옳지 않다. 그에게 수련생을 보라고 한 책임자도 나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 수련생이 어떻게 수련했는가는 그의 心性(씬씽)을 보아야 한다는 사부의 말을 왜 듣지 않는가? 당신들은 아는가? 모든 공간은 동시동지(同時同地)에 존재한다. 어느 한 공간의 생물이든지 인체와 중첩될 수 있으므로 마치 부체(附體)와 흡사하지만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소위 천목(天目)이 열린 사람이 이런 복잡한 상황을 알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이 사람은 부체(附體)가 있고, 저 사람에게도 부체가 있다고 한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알려주는데, 이것은 바로 이런 말을 한 사람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일어난 일이다.

우주의 공간은 매우 복잡하다. 현재까지 인류의 언어를 다 써서야 나는 여기까지 말할 수 있었는데, 많은 상황은 인류의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원만한 제자라 하더라도 역시 오로지 그가 얻은 과위에서 증오(證悟)한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을 뿐인데, 하물며 수련 중의 사람임에랴?

李洪志
1997년 6월 18일

 

정론(定論)

대법제자들은 기억하라. 장래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사람이 어떠한 구실로 대법(大法)을 부(部)ㆍ파(派)ㆍ문(門)ㆍ종(宗) 따위로 갈라놓는 유사한 행위는 모두 난법(亂法)이다. 내가 당신들에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은 것을 당신들은 영원히 할 수 없다. 과시심, 게다가 환희심은 마(魔)에게 이용당하기가 가장 쉽다. 당신들이 대법(大法) 중에서 무엇을 깨달았든지 모두 끝없는 법리가 한 층차 중에 존재하는 법리의 한 점에 불과한 것으로, 이로써 법 또는 법의 어느 한 부분, 심지어 어느 한마디 말에 대해서도 정의(定義)를 내릴 수 없다. 만약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한다면, 말이 나오자마자 죄업(罪業)이 이루어지는지라, 중한 자는 심중(深重)하기가 산과도 같고, 하늘과도 같으니, 어찌 수련할 것인가? 대법(大法)을 뜯어고치고 따로 수작하는 자는 그 죄가 크기로 끝이 없으니, 생명이 악업(惡業)을 갚을 때, 층층이 깡그리 소멸하는 고통은 영원히 끝이 없는 것이다.

대법(大法)은 건곤(乾坤)을 바로잡을 수 있으므로, 물론 사악한 것을 짓누르고 난잡한 것을 소멸하며, 원용(圓容), 불패(不敗)의 법력(法力)이 있다. 사실 이 면의 교훈은 이미 아주 많다. 이런 난법(亂法)의 일은 신(神)이 호법(護法)할 것이다. 중생이 대법(大法)을 소중히 함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고 중생에 대한 자비이다. 대법(大法)은 불변부동(不變不動)하며, 끝없이 그치지 않고 길이 세상에 존재하리니 천지(天地)는 영원히 확고하리라.

李洪志
1997년 7월 1일

 

시간과의 대화(和時間的對話)

사부(師): 당신은 나의 제자에게 아직도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까?

신(神) : 당신의 제자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사부: 어떠한 두 부분입니까?

신 : 한 부분은 당신의 요구에 따라 법 중에서 정진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비교적 좋습니다. 한 부분은 사람의 것을 품고 놓지 못하며 정진하지 못합니다.

사부: 그렇습니다. 나도 보았습니다.

신 : 당신이 그들에게 법을 요해(了解)하는 과정을 주었기에 어떤 사람은 각양각색 목적을 품고 들어왔습니다. 법 공부를 거쳐 대부분 사람은 초기의 법 공부 목적을 개변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 일부는 아직도 개변되지 않았습니다.

신 :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사부: 그렇습니다!

신 : 제가 보기에 신(神)이 될 수 없는 사람은 더 미루지 마시지요. 사실 그는 사람일 뿐입니다.

사부: (혼잣말) 인간 세상 속에서 그들은 참으로 너무나 깊이 미혹되었다. 최후엔 다만 이럴 수밖에 없다. 최후에 사람마저도 되지 못할까 걱정이다!

신 : 사실 새로운 세계에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괜찮은 것입니다. 우주 중에서 역사에 의해 도태된 무수한 고층 생명과 비교해 보면, 이미 비할 바 없는 행운입니다.

사부: 나는 아직도 더 기다리고자 합니다. 인류를 파괴하는 더욱 미시적인 물질을 깨끗이 청리(淸理)할 때, 다시 어떠한가를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필경 그들은 법을 얻고자 온 것이니까요.

신 : 현재 이 한 패의 사람들을 놓고 말하면, 그들 어떤 사람이 법을 공부하러 옴은, 인생목표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개변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인식을 품고 있습니다.

사부 : 이러한 사람은 신수련생이 비교적 많습니다.

신 : 그들 중에는 또 그들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법의 일면을 찾으러 온 사람이 있는데 오히려 그들 자신이 법을 전부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다른 일면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부 : 이러한 것은 노제자 중에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의 가장 뚜렷한 표현은, 그들은 늘 사람과 비교하며, 늘 그들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법의 각 층차의 요구로 자신을 가늠하지 못합니다.

신 : 이러한 문제는 이미 몹시 심각합니다. 상대방이 어떠어떠하다고 그들이 본 것으로 반대로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부: 마땅히 그들로 하여금 청성(淸醒)하게 하며 그들의 환경을 진정으로 수련하는 환경으로 만들어 진정한 신(神)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李洪志
1997년 7월 3일

 

도법(道法)

장기간 대법(大法) 중의 중생, 특히 제자는 법에 대해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방면에서 일종 부동한 층차의 오해가 줄곧 존재하였다. 매번 마난(魔難)이 닥쳐올 때, 본성(本性)의 일면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완전히 사람의 일면으로 이해한다. 그럼 사악한 마(邪魔)는 이 점을 이용하여 끝없이 교란하고 파괴함으로써, 수련생으로 하여금 장기간 마난 속에 빠지게 한다. 사실 이것은 사람의 일면이 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빚어진 것이며, 인위적으로 당신들 신(神)의 일면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신들이 이미 수련 성취된 그 부분을 억제하여 신의 일면이 법을 바로잡는 것을 저애하였다. 아직 수련 성취되지 않은 일면이 어찌 주사상(主思想)을 억제하며, 이미 법을 얻은 일면을 억제할 수 있는가? 인위적으로 사악한 마를 자양(滋養)하여 그것이 법의 틈을 타게 한 것이다. 제자로서 마난이 올 때, 정말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거나 부동한 층차에서 당신에 대한 부동한 요구에 부합하도록 마음을 둔다면, 충분히 고비를 넘을 수 있다. 끝없이 끌고 내려간다면, 만약 心性(씬씽) 또는 행위에 다른 문제가 없다면, 사악한 마(魔)가 당신들이 방임(放任)한 틈을 탄 것이 틀림없다. 수련하는 사람은 필경 속인이 아닌데, 그럼 본성의 일면이 왜 법을 바로잡지 않는가?

사부가 오늘에야 비로소 이 법을 말하는 원인은 두 가지다. 첫째는 당신들이 이 방면의 문제가 뚜렷하고, 둘째는 법에 대해 아주 깊은 인식이 있어 법을 단순하게 이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들도 ‘자연(自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필연(必然)’이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자연’이란 사람이 우주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물질의 현상에 대하여 해석하지 못한 나머지 무책임하게 스스로 그럴듯하게 하는 말이다. 그들 역시 그 ‘자연’이란 자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이런 의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당신들은 이 일체 마난(魔難)이 모두 필연적이고 바로 이러하다고 인정하므로, 일종 어찌할 수 없는 소극적인 상태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들 사람의 일면은 명백해야 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법을 얻은 그 일면이 똑똑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의하라. 나는 당신들에게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들이 법리(法理)를 알게끔 할 뿐이다. 이 방면의 인식이 똑똑해야 한다. 사실 대법(大法)은 단지 사람만 제도하는 것이 아니다. 역시 각계 중생에게 말해 주는 것으로, 깨달은 본성은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당신들 사람의 이 일면을 애호(愛護)함은 당신들에게 법에서 깨우치게 하는 데 있다. 대법(大法)은 중생을 원용(圓容)하고 있고, 중생 역시 대법(大法)을 원용하고 있다. 내가 당신들에게 법의 장엄함과 신성함을 알려준 목적은 법에 대한 당신들의 미혹, 오해를 지워버리는 데 있다.

李洪志
1997년 7월 5일

 

속인 마음을 버리고 착실한 수련을 견지하자(放下常人心堅持實修)

대법(大法)이 유전(流傳)됨에 따라, 대법(大法)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주의해야 한다. 속인의 그런 등급(等級)관념을 대법(大法)에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신노수련생은 모두 이 문제를 주의해야 한다. 법을 배우러 온 사람의 학문이 얼마나 높거나, 사업을 얼마나 크게 하거나, 관직이 얼마나 빛나거나, 어떤 특수기능이 있거나, 어떤 공능이 존재하거나 간에 모두 착실히 수련해야 한다. 수련이란 수승(殊勝)하고 엄숙한 것이다. 당신들의 그 특유한 속인의 마음을 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는, 당신들로 말하면 아주 넘기 어렵지만, 반드시 넘어야 할 큰 고비다. 어쨌든 착실히 수련하는 제자로서 반드시 이런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이 마음을 제거하지 않고 원만하기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제자도 역시 이 문제에 주의해야 한다. 법을 배우는 사람이 많아지면 신수련생을 인도하여 착실히 수련하는 것을 더욱 중시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 된다. 조건이 되는 사람은 법 공부와 연공 시간을 늘릴 수 있다. 대법(大法)의 전통을 유지하고 대법(大法)의 수련원칙을 수호하며 착실한 수련을 견지함은 매 대법제자의 장기적인 고험이다.

李洪志
1997년 7월 31일

 

취중(取中)

대법제자들로 하여금 수련 중에서 굽은 길을 적게 걷도록 하려고, 매번 보편성을 띠거나 엄중한 문제가 나타났을 때, 나는 글 한 편을 써서 제때에 지적함으로써, 제자들이 명백해지도록 했고 대법(大法)이 손실을 적게 받도록 했다. 길을 올바르게 걷는지 걷지 못하는지는, 단지 제자가 수련함이 바른지 바르지 않은지 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법(大法)의 정체(整體) 형식이 바른지 바르지 않은지가 역시 관건이다. 그러므로 사부로서는 나타나는 편차(偏差)를 늘 수정해야 한다.

제자들의 인식 차이로 말미암아, 일부 제자는 늘 한 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으로 넘어간다. 매번 내가 쓴 법을 보고 과격하게 행동하여 또 새로운 문제를 초래한다. 내가 당신들에게 사람의 인식을 전변하라는 것은, 당신들에게 사람이 대법(大法)을 인식하는 이런 상태를 고수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지(理智)적이지 못하여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하라는 것도 아니며, 당신들에게 대법(大法)을 청성(淸醒)하게 인식하라는 것이다.

李洪志
1997년 8월 3일

 

법이 사람 마음을 바로잡다(法正人心)

대법(大法)을 수련하는 제자가 많아짐에 따라, 대법(大法)을 요해(了解)하려는 사람 역시 더욱 많아졌다. 하지만 그중 일부 사람은 수련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인류사회는 이미 출로(出路)가 없는 것을 보고 대법(大法) 중에서 출로를 찾고자 한다. 그리하여 수련생의 성분이 순결하지 못하게 되었고 동시에 또 대법(大法)으로 하여금 다른 한 면에서 교란을 받게 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에서 일부 계발을 받아 무슨 사회상의 문명적 거동을 한다. 대법(大法)에서 왔으나 오히려 대법(大法)을 실증하지 못하는, 법을 훔치는 이런 행위는 다른 한 면에서 대법(大法)을 깎아내리고 있다. 사실 어떤 운동도 모두 본질에서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키기란 불가능하며 현상 역시 오래갈 수 없다. 오래되면 사람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중에 또 더욱 해결하기 어려운 좋지 않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대법(大法)은 절대 여기에 떨어질 수 없다.

현재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등 언론매체에서 선전하는 좋은 사람, 좋은 일은, 대부분 모두 우리 대법(大法) 수련생이 대법(大法)을 수련함으로써 心性(씬씽)이 제고된 후에 한 것이다. 그러나 보도 중에는 오히려 이 사람은 모범이고 무슨 핵심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따위의 원인으로 된 것이라는 모자를 씌워, 대법(大法)을 수련함으로써 나타난 행위임을 완전히 말살해 버렸다. 그 주요한 원인은 제자들 자신이 조성한 것이다. 수련이란 위대하고 수승(殊勝)한 일인데, 왜 정정당당하게 취재하는 기자에게 당신이 대법(大法)을 수련하여 이리된 것이라고 알려주지 않는가? 만약 보도하는 자가 대법(大法)을 제기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 역시 법을 훔치고 또한 대법(大法)을 실증하지 않는 어떠한 형식을 위해 분칠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여러분들이 모두 좋은 사람으로 되고 있으므로, 사회에 대하여, 인류에 대하여 유익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공정하고 합법적인 환경이 있으면 안 되는가? 제자들이여, 당신들은 기억하라. 대법(大法)은 당신들을 원용(圓容)하고 있으며 당신들 역시 대법(大法)을 원용하고 있다.

李洪志
1997년 8월 17일

 

출가제자의 원칙(出家弟子的原則)

요즈음 일부 종교 중의 출가제자가 대법(大法)을 수련하고 있다. 그들이 재빨리 제고하여 올라오게 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근대 종교 중에서 양성된 더러운 습관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 방면에서 속인 중에서 수련하고 있는 우리 대법제자도 그들의 이러한 것을 조장(助長)하지 말아야 한다. 석가모니부처가 남긴 출가인이 수련하는 방법은 아주 좋다. 그러나 근대 출가인은 그것을 개변했다. 왜냐하면, 많은 출가인이 돈과 재물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또 일부 이유를 엮어 교활하게 변명한다. 예컨대 무슨 절을 짓고 불상을 세우고 불경을 찍기 위해서며 절의 지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등등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 수련이 아니며 모두 유위(有爲)인 일로서, 착실하게 수련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므로, 절대 이로써 원만할 수 없다.

대법(大法) 수련은 돈을 위하고 재물을 위하는 마음을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대법제자의 표준에 부합하겠는가? 또 출가제자가 특수한 상황이 없이 외출할 때,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거나 혹은 배를 타고 여행해서는 안 되며 일률적으로 행각(行腳)해야 한다. 고생을 겪어야만 비로소 업을 갚을 수 있다. 배고프면 사발을 들고 탁발해야 한다(다만 음식물을 빌어야 하며, 돈을 달라고 하거나 재물을 달라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밤에는 각지 대법제자의 집에서 투숙할 수 있으나 오래 있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출가인의 수련상태는 재가제자(在家弟子)와는 같지 않은 것으로, 사회 역시 당신들을 속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출가제자로 하여금 재빨리 원만하도록 하기 위해 세간에서 자신을 연마(魔煉)해야 하며 절대 향락을 탐하게 해서는 안 된다. 또 어떠한 구실로도 명예를 도모하고 이익을 도모해서는 안 되며 돈을 달라고 하여 집으로 부쳐서는 더욱 안 된다. 세속의 생각을 끊지 못하면 출가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에는 출가함에 아주 엄격한 요구가 있었다. 대법(大法) 출가제자는 마땅히 더욱 엄격히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 기왕 집마저 다 나왔는데 무엇 때문에 아직도 세속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는가?

제자들이여! 세간의 모든 것을 버림은 재가제자로 말하면 집착을 점차 버리는 것이나, 출가제자에 대해 말한다면 반드시 먼저 해야 할 것이며 출가의 표준이다.

李洪志
1997년 10월 16일

 

환경(環境)

내가 대법제자에게 남겨놓은 수련형식은 제자들이 진정하게 제고하여 올라올 수 있게 하는 보장이다. 예컨대 나는 당신들에게 공원에 가서 여러 사람이 단체로 연공하는 환경을 이루라고 했다. 이 환경은 사람의 표면을 개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 환경에서 형성된 대법제자의 높은 경지의 행위는, 일언일행(一言一行)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차이를 찾을 수 있게 하며, 사람을 감동하게 할 수 있고 사람들의 행위를 용련(熔煉)시킬 수 있으며, 사람들을 더욱 빨리 제고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수련생 또는 혼자서 배우는 제자는 반드시 연공장에 가서 연공해야 한다. 현재 국내 연공장에 대략 4천만 명이 매일 단체로 연공하고 있으며 또 연공장에 자주 가지 않는 노제자(노제자로서는 정상적인 것으로, 이는 수련상태가 조성한 것임)가 몇천만 있다. 그러나 신제자는 꼭 이 환경을 잃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사회에서 접촉하는 것은 모두 속인일 뿐만 아니라 인류도덕이 급속히 미끄러져 내려온 후의 속인이라, 이 큰 염색항아리(大染缸)는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물결치는 대로 표류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또 대법(大法)을 새로 배우는 많은 사람이 집에서 몰래 연마하고 있는데, 창피하다고 여겨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럼 당신이 생각해 보라. 이것은 어떤 마음인가. 일반적인 두려움은 집착이라 수련 중에서 닦아 없애야 하는데, 당신은 당신이 대법(大法)을 배우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하는가? 수련이란 아주 엄숙한 일일진대, 자신은 마땅히 어떻게 자신과 법을 대해야 할 것인가? 또 어떤 사람은 지도자라고 나와서 연공하는 걸 쑥스럽게 생각한다. 요만한 정(情)마저도 제거하지 못한다면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사실 당신이 연공장에 나간다고 남이 꼭 당신을 아는 것이 아니다. 어떤 직장은 몇몇 지도자가 거의 다 배우고 있으나, 서로 간에 상대방이 배우고 있는지 모른다. 환경은 당신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며, 또한 제고하는 관건이다. 나는 당신들이 법 공부를 하고 연공할 때 심태가 아주 좋으나, 사업을 접촉하고 사람을 접촉하게 되면 당신들은 속인과 같으며, 때로는 속인보다도 못한 표현을 종종 본다. 이 어찌 대법(大法)을 수련하는 제자의 행위이겠는가?

나는 당신들을 제자로 삼고자 하나 당신들 자신이 제자가 되려 하지 않는데 어쩌겠는가. 수련 중에서 제거해야 할 마음 하나하나가 모두 장벽으로서, 거기에 가로놓여 당신이 수련하는 길을 막고 있다. 법 자체에 대하여 아직도 견정(堅定)하지 못하다면 수련할 수 없다. 당신의 속인 중 직위를 너무 중하게 보지 말고 대법(大法)을 배우면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말라. 당신들이 생각해 보라. 인류가 말하는, 자신이 원숭이에서 진화해 왔다는 설마저 우아한 자리에 올라앉았는데, 당신들은 오히려 이렇듯 위대한 한 부의 우주 대법(大法)에 정확한 위치를 주기에도 쑥스러워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진정한 치욕이다.

李洪志
1997년 10월 17일

 

뿌리를 캐다(挖根)

최근 한 시기, 예부터 기공을 반대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그 몇몇 건달문인(文痞)ㆍ건달과학자(科痞)ㆍ건달기공사(氣功痞)가 끊임없이 소란을 피워 천하가 어지럽지 않을까 걱정이다. 전국 각지의 일부 신문ㆍ라디오ㆍ텔레비전, 이런 선전기구를 직접 사용하여 우리 대법(大法)을 파괴함으로써, 대중 속에 극히 나쁜 영향을 조성하였다. 이것은 소홀히 할 수 없는, 인위적으로 대법(大法)을 파괴하는 짓이다. 이런 극히 특수한 상황하에서 북경 대법제자들이 한 가지 특수한 방법을 취해 그 사람들에게 대법(大法)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사실 잘못한 것이 없다. 이는 다만 극히 한정된 상황하에서 한 것이다(다른 지역은 모방할 수 없음). 하지만 사실을 요해(了解)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이런 선전기구를 향해 수련생 대중이 자발적으로 우리의 실제 상황을 천명하는 이것 역시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당신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이 일 자체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이런 일을 통해 일부 사람들을 폭로했는데, 아직도 근본적으로 속인의 관념을 개변하지 못했고, 아직도 사람이 사람을 수호하는, 그런 유의 관념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나는, 대법(大法)은 절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일 자체는 바로 그들이 우리의 진실한 상황을 요해(了解)하게 하여 정면으로 우리를 인식하고 우리를 정치에 끌어들이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다른 한 각도에서 말한다면, 대법(大法)은 사람의 마음이 선(善)을 향하게 하고 사회가 안정되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명확해야 한다. 대법(大法)은 이런 것을 위해 전한 것이 아니며 수련을 위한 것이다.

대법(大法)은 가장 낮은 인류에게 이 한 층의 생존방식을 창립해 주었다. 그럼 이 한 층 사람의 생존방식 중에서 각종 사람의 행위, 집단으로 누구에게 사실 상황을 반영하는 등등을 포함하여 법이 가장 낮은 층차의 인류에게 준 무수한 생존방식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닌가? 다만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에 선(善)ㆍ악(惡)이 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쟁이 있고 정치가 있을 수 있다. 대법제자가 하나의 극히 특수한 상황하에서, 가장 낮은 층차에서 법의 이런 방식을 취하고, 또한 완전히 선(善)한 일면을 쓴다면, 이것은 인류 이 한 층차에서 법을 원용(圓容)하는 행위가 아닌가? 단지 극히 특수한, 극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 방식을 취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일찍이 소수 사람의 마음이 대법(大法)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사회의 무엇을 수호하기 위한 것임을 보았다. 만약 당신이 한 속인이라면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인류사회를 수호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수련하는 사람이다. 어떤 기점(基點)에 입각하여 대법(大法)을 대하는가 하는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로서, 바로 내가 당신에게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수련하는 중에, 나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들의 온갖 마음을 폭로하게 하며 뿌리부터 그것을 파낸다.

당신들은 늘 나에게 위로 이끌게만 하고 당신들 스스로 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법을 명시적으로 말해야만 당신들은 비로소 움직이며,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거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나는 이런 행위를 수련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관건적일 때, 내가 당신들에게 사람과 결별하라고 하면, 당신들은 나를 따라오지 않는데, 기회는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다. 수련은 엄숙한 것으로,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 갈수록 크다. 수련 중에 사람의 어떠한 것을 섞든지 모두 극히 위험하다. 사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괜찮지만, 당신들은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길은 당신들 자신이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통해 또 몇 사람이 제자 중에서 곳곳으로 돌아다니며 파괴 작용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올바르게 사고하고 선의(善意)적으로 보도소에 자신의 인식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수련생 중에서 헛소문을 퍼뜨리고, 이간하며, 패거리를 만들었는데, 속인의 가장 좋지 못한 수단을 썼다. 더욱 심한 자는 이지(理智)를 잃고 수련생을 내쫓았다. 내쫓긴 어떤 수련생이 당신보다 얼마나 잘 수련했는지 당신들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이렇듯 이지를 잃고 화가 나서 야단인가? 이런 마음이 아직도 당신에게 자신의 그 강렬한 집착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이 법은 상상할 수 없이 크다. 당신들은 그 법리(法理)를 영원토록 전부 알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형식을 중시하지 않는다. 나는 각종 형식을 이용하여 아주 깊이 은폐된 당신들의 마음을 폭로하게 하여 그것을 제거해 버린다.

李洪志
1998년 7월 6일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爲誰而存在)

사람이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것은 관념이다. 어떤 자는 가짜 이치(假理)를 위해 생명을 바칠지언정 개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관념 자체는 오히려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사람은 줄곧 자신으로 하여금 더 사고하지 않고 오히려 일체를 아끼지 않고 대가를 치러도 동요하지 않게 하는, 이런 염두(念頭)를 자신의 사상이라고 생각하여 진리를 보아도 다 배척한다. 사실 사람은 선천적인 순진(純眞)을 제외하고 일체 관념은 모두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지 자신이 아니다.

만약 이 후천적인 관념이 아주 강하게 변하면 그는 곧 사람의 진정한 사상과 행위를 지배하는데, 이때에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거의 사람마다 이러하다.

만약 한 생명이 진정으로 중대한 문제에 관련하여 어떠한 관념을 갖지 않고 문제를 가늠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정말로 자신이 자신을 주재(主宰)할 수 있다. 이런 청성(淸醒)은 지혜이며 일반인의 이른바 총명(聰明)과는 다르다. 만약 이럴 수 없다면 이 사람은 곧 후천적인 관념 또는 외래 사상에 의해 지배당하게 마련이다. 심지어는 그것을 위해 한평생 분투하며 늘그막에 와서도 자신이 일생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비록 일생에 얻는 것이 없으나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의 지배하에 잘못된 일을 무수히 한다. 자신이 한 잘못한 일에 따라 내세에 자신으로 하여금 업력을 갚게 한다.

사람이 충동될 때 사람의 사상 정서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理性)이 아니라 감정이다. 과학을 신앙하고, 종교를 신앙하고, 사상을 신앙하는 등등 각종 관념이 불법진리(佛法眞理)의 충격을 받으면, 마찬가지로 충동할 수 있으며 인성(人性)의 악한 일면이 주도적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신으로 하여금 후천적 관념의 지배를 받아 더욱 이지(理智)적이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단언(斷言)하거나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심지어 인연 있는 사람도 이 때문에 기회와 인연을 잃고, 자신의 행위로 인해 영원히 깊은 고통과 후회를 조성하게 된다.

李洪志
1998년 7월 11일

 

법 중에 용해되자(溶於法中)

현재 대법(大法) 수련생이 갈수록 많아질 뿐만 아니라,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 감성적 인식에서 앞사람을 추월하는 추세인데, 애초 사회적으로 극좌(極左) 사상의 장애가 없고 관념상의 인식과정이 없기 때문이며, 단체 법 공부를 할 때 많은 시간을 들여 토론할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마땅히 많은 시간을 법 공부에 써서 재빨리 제고해야 한다. 사상 중에 많이 담을수록 변화가 빠르게 마련이다.

이전에 나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인가를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한 것이 표현되었다고 이 사람이 곧 나쁜 사람이고, 좋은 일을 하였다 하여 이 사람이 곧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에 온통 다 나쁜 사상이지만 단지 표현하지 않았거나 더욱 원활(圓滑)하게 은폐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본래 괜찮으나 다만 이따금 잘못된 일을 했는데, 그렇다고 이 사람이 꼭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럼 어떻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가?

사람은 마치 하나의 용기(容器)와도 같아 무엇을 담으면 곧 무엇이다. 사람이 눈, 귀를 통하여 보고 듣는 것은 모두 문예작품 중의 폭력, 색정(色情), 아귀다툼과 현실사회 중의 이익 다툼, 금전만능 관념이나 기타 마성(魔性)적인 표현 따위로서, 담은 것은 모두 이러한 것들이다. 이러한 사람은 곧 진정하게 나쁜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표현하든지 사람의 행위는 사상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다. 머리에 온통 이런 것들인 사람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단지 사람은 모두 많든 적든 같지 않은 정도의 사상 오염문제가 있기 때문에 표현된 문제에 대하여 느끼지 못할 뿐이다. 사회의 그릇된 유도가 각개 영역에 반영되어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개변시키고 인류에게 해독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며, 아직도 대량적인 반 전통(反傳統), 반 정통(反正統), 반 도덕적 관념의 마성 인류를 육성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정말 걱정스러운 것이다! 사회경제가 올라갔다 할지라도 역시 이러한 사람의 손에서 패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의 사상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사람이 인류 천백 년 이래 선량한 전통사상을 받아들이며 사람의 정통적인 행위와 규범을 신앙하고 담은 것들이 모두 좋은 것이라면, 이 사람의 행위는 어떠하겠는가? 이 사람은 표현하든 표현하지 않든 정말로 좋은 사람이다.

수련생으로서 머리에 담은 것이 모두 대법(大法)이라면 이 사람은 반드시 진정한 수련자다. 그러므로 법 공부를 하는 문제에서 청성(淸醒)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책을 많이 보고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진정하게 제고하는 관건이다. 더 분명히 말한다면, 당신이 대법(大法)을 보기만 하면 변하고 당신이 대법(大法)을 보기만 하면 제고된다. 대법(大法)의 끝없는 내포, 게다가 보조적인 수단인 연공은 당신들을 원만하게 할 것이다. 단체로 읽거나 개인적으로 보거나 모두 마찬가지다.

옛날 사람의 한마디가 있다. ‘아침에 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可死).’ 오늘날 인류는 그 함의를 진정하게 아는 사람이 이미 없다. 당신들은 아는가? 한 사람의 사상 속에 이미 법을 담았다면, 법을 담은 그 일부분은 법에 동화(同化)된 것이 아닌가? 도(道)를 들은 사람이 죽은 다음 그 한 부분은 어디로 가는가? 내가 당신들에게 법 공부를 많이 하고 집착심을 많이 제거하여 사람의 각종 관념을 내려놓으라고 함은, 당신들에게 일부분만 갖고 가라는 것이 아니고, 원만하라는 것이다.

李洪志
1998년 8월 3일

 

불법과 불교(佛法與佛敎)

사람들이 부처(佛)를 언급하기만 하면, 많은 사람은 바로 불교를 연상한다. 사실, 불교는 단지 불법(佛法)이 인간 세상에서 표현된 한 가지 형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불법(佛法)은 세상에서 또 다른 표현형식이 있는데, 다시 말해서 불교는 불법(佛法)의 전부를 대표하지 못한다.

그 불교만 말하더라도, 역시 전부 다 석가모니부처가 전한 것이 아니다. 세간에는 또 다른 불교가 있고, 또한 석가모니부처를 교주로 여기지 않는데, 심지어 어떤 것은 석가모니부처와 전혀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티베트 불교의 황교(黃敎), 그들이 공양하는 것은 대일여래(大日如來)며, 게다가 황교는 석가모니부처를 단지 대일여래의 한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한다. 티베트에 전해진 불교 중 백교(白敎)가 공양하는 것은 밀라레빠(密勒日巴)로서, 석가모니부처와 전혀 관계가 없고, 또한 석가모니교의 일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그 당시, 신도들은 석가모니부처의 명호(名號)조차 몰랐는바, 석가모니부처가 누구인지도 전혀 몰랐다. 티베트에서 전해진 불교의 다른 교(敎)들도 석가모니부처에 대한 인식이 또한 같지 않았다. 소승(小乘)불교는 줄곧 자신들이 석가모니부처의 정전불교(正傳佛敎)라고 여기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확실히 형식상에서 석가모니부처 시대의 수련형식을 계승했고, 원래의 계율과 복장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석가모니부처 한 분만을 모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한인지역(漢地)의 불교는 오히려 개량을 거친 후 중국으로 전수되어 들어온 것으로, 수련 형식상에서도 완전히 같지 않으며, 여러 부처를 신봉(信奉)하였고 단지 석가모니부처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계율(戒律)도 배로 늘어났으며, 동시에 고대 한인지역의 민간 종교의식을 섞어 넣어 법사(法事) 속에는 또 목어(木魚), 타종(撞鍾), 바라와 북 등 중국 악기를 채용했으며, 복장 또한 중국 고대인의 민간 의복으로 갈아입고서, 대승(大乘)불교라 고쳐 불렀다. 이는 당초 석가모니불교와는 차이가 이미 아주 컸기 때문에, 그 당시 소승불교는 대승불교를 석가모니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불교 중에서 불법(佛法)과 불교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그럼, 우리는 또 역사에서 말해 보자. 서방 사회에서 출토된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도 만자(卍字) 도형을 발견했다. 사실, 대홍수(大洪水) 이전의 상고(上古)시대에는, 그들 역시 부처를 신봉(信奉)했다. 대홍수가 났을 때 일부 서아시아와 히말라야 산의 서남쪽 일대에 살던 고대 그리스 인종(人種)이 살아남았는데, 바로 지금의 백인종 인도인이며, 그 당시에는 브라만(婆羅門)이라고 불렀다. 사실, 브라만교가 처음에 신봉한 것은 부처였고, 상고(上古)시대 그리스인이 신봉한 부처의 계승이었으며 그 당시 그들은 부처를 신(神)이라 불렀다. 대략 1천 년이 지나, 브라만교는 바로 현대불교인 대승불교의 개량, 티베트 불교의 개량, 일본불교의 개량 등등처럼 개량하기 시작했다. 1천여 년 후의 고인도(古印度)에 이르러, 브라만교가 말법시기에 진입했을 때, 사람들은 부처 이외에 난잡한 것들을 신봉하기 시작했는데, 이때의 브라만은 이미 부처를 믿는 사람이 없었으며, 믿는 것은 모두 마(魔)였고, 살생하여 가축으로 제를 올리는 상황이 나타났다. 석가모니부처가 세상에 왔을 때 브라만교는 이미 완전히 사교(邪敎)로 변해 버렸다. 이것은 부처가 어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이비로 변했다는 말이다. 인도 고대에 남겨놓은 문물에서도 브라만교가 초기에 남겨놓은 산굴의 조각상 등을 찾아볼 수 있는데, 조각된 신상(神像)은 모두 부처의 형상이다. 이것은 우리 한인지역의 불교에서 조각된 불상 중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몇몇 큰 석굴 속에 두 부처가 마주 앉아있는 조각상 등이 있다. 부처는 여전히 부처이고, 종교가 사이비로 변한 것이다. 종교는 신불(神佛)을 대표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심이 나빠져서 종교를 변이(變異)시킨 것이다.

이 일체는 불법(佛法)이 영원한 것임을 설명하며, 불법(佛法)은 우주의 특성이고, 위대한 불법(佛法)이 부처를 육성한 것이지, 석가모니부처가 불법(佛法)을 육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석가모니부처가 불법(佛法)을 깨달았고, 자신의 과위(果位)를 증오(證悟)한 것이다.

나는 다시 이번 시기 인류 문명을 말하고자 한다. 당신들은 아는가. 도(道)는 신(神)의 일종이고 불(佛)도 신(神)의 일종이며, 아울러 여호와와 예수, 성모 마리아도 신(神)의 일종으로서, 수련의 목표와 우주 대법(大法)에 대해 증오(證悟)한 인식이 다름으로 인해 얻은 과위(果位)와 외형(外形)이 다를 뿐이다. 방대한 천체는 불법(佛法)이 육성한 것이지, 이러한 불(佛)ㆍ도(道)ㆍ신(神)이 육성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알 수 있고 사람이 모르는 것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석가모니부처는 여래부처만 해도 많기가 마치 갠지스 강의 모래와 같이 많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부처들이 말한 법이 석가모니부처가 말한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인간 세상에 와서 법을 전한다면, 석가모니부처가 이전에 말한 것과 글자 하나 틀림없이 똑같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 석가모니부처가 와서 법을 전하기 전에 육불(六佛)이 말한 것은 석가모니부처가 말한 법인가? 그렇다면, 불교 중에서 말한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세상에 와서 설법한다는데, 석가모니부처의 말을 다시 반복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날 불교가 이 모양으로 변하게 된 것을 보니 마음속으로 아주 괴롭다. 종교 자체에 어리석게 미혹된 것이지 진수(眞修)하는 것이 아니다. 위선자, 종교건달(痞子)들이 수련하는 장소와 출가인을 심하게 패괴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결코 이상할 것도 없다. 사실 석가모니부처도 일찍이 말법 시기의 상태를 말했는바, 현대 불교와 후기의 브라만교는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오늘날, 나는 다시 한 번 세상에 와서 법을 전하며 더욱이 직접 우주의 근본 대법을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인정하지 못하는데, 수련에서가 아니라 종교 자체와 속인의 감정을 수호하는 데서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종교를 마치 부처와 마찬가지로 여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불교 중의 위엄과 명망이 충격을 받음으로 인해, 속인의 마음을 움직여 반대하는데, 이런 집착이 그래도 작단 말인가? 다른 의도가 있는 그런 사람들은 불법(佛法)과 부처마저도 감히 욕하는데 이미 지옥의 귀신으로 되었으나, 단지 인간 세상의 수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줄곧 무슨 종교의 학자로 자처하지만, 그들이 불법(佛法)을 진정하게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흔히 사람들이 부처를 언급하기만 하면 그들은 즉시 불교를 연상하고, 불가(佛家)를 언급하기만 하면 그들은 바로 그들 한 가(家)의 불교를 언급한 것처럼 여기며, 사람들이 불법(佛法)을 언급하기만 하면 그들은 곧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런 것이라고 여긴다. 전 세계에 장기간 깊은 산 속에서 수련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역시 부동(不同)한 불가 수련방법에 따라 수련하고 있으며, 천백 년 이래 줄곧 전승(傳承)되고 있으나, 석가모니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러한 용어 개념마저도 모두 똑똑히 분별하지 못하는 종교 건달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 法輪大法(파룬따파)를 비평할 수 있겠는가? 그 당시 예수의 출현은 유태교를 노하게 했고, 2천5백 년 전 석가모니부처의 출현은 브라만교를 건드렸다. 역사적으로 정면(正面)적인 교훈은 사람에게 마치 영원토록 거울이 되지 못하는 것 같고, 그와 반대로 사람은 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반면 교훈을 계(戒)로 인용하고 있다. 우주에는 성(成)ㆍ주(住)ㆍ괴(壞)의 법칙이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부동(不同)한 시기에 모두 부처가 세상에 와서 법을 전하고 사람을 제도했으며, 역사는 바로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바, 미래의 인류도 마찬가지로 불법(佛法)을 들을 것이다.

李洪志
1998년 12월 17일

 

북경 노수련생에게

북경 노수련생:

신고 등록 문제에 관해 내 생각을 말하겠다. 우리도 국가체육총국(國家體育總局)에 우리의 태도를 밝힐 수 있으며 우선 분명하게 말해야 할 것은:

1. 우리는 몸을 건강하게 하는 기공이 아니고 우리는 수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련자로 하여금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데 도달하게 할 수 있다.

2. 우리는 조직형식이 없는 한 갈래 대도무형(大道無形)의 길을 걸으며, 돈을 저금하지 않고 물건을 장만하지 않으며 관직을 주지 않고 직무(職務)가 없다. 만약 각 지역에서 모두 무원칙하게 등록하고 무슨 직무가 있고 무슨 규칙이 있어 몸을 건강히 하는 그런 기공 혹은 가짜 기공 활동에 참여한다면 이는 절대 안 된다.

3. 나는 국가체육총국에 한번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 내가 기공과학연구회에서 탈퇴한 목적은 그런 소위 기공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소위 기공들은 바로 돈과 재물을 사취하기 위한 것으로, 소위 말하는 몸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는 기공 역시 돈을 위한 것이다. 무슨 기공사 평가를 한다는데 그것은 몇십 년간 수련해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평가하는 것은 책임지지 않는 것이며 사회에 대해 해로운 것으로 사람의 각종 좋지 않은 마음을 조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사람의 이런 집착심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호하게 그들과 함께 어울릴 수 없다.

만약 독립적으로 등록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북경에서 통일적으로 국가에 등록 등기하기에 각 지역에서는 단독으로 등록 등기하거나 혹은 신고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독립적으로 등록할 수 없다면 그럼 예전처럼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법 공부하고 연공하며 조직 없이 자원(自願)하여 아침 연공에 참가함으로써 그 특징과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

李洪志
1998년 12월 25일

 

대법(大法) 산동 보도소에

대법 산동(山東) 보도소:

경운(慶雲) 수련생이 절을 짓는 일에 대해 수련생들에게 분명히 말하겠다. 이는 우리 대법(大法)이 하려는 일이 아니고 대법(大法) 수련과 무관한바 마음을 여기에 쓰지 말아야 한다. 출가인(出家人)이 절을 짓는 그것은 개인 행위이고 출가인의 일이다. 그 당시 출가인이 법을 배움에, 사부인 나로서는 제자가 기거하는 일을 고려하고 이 일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현재 상황을 말하자면 사람 마음이 들뜨게 하여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 공부를 할 수 없으며, 일부 외지 수련생들은 집에서 안심하고 법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경운에 가서 그녀들과 함께 뒤섞여 있다. 이 일은 이미 수련생의 수련을 엄중하게 교란했다. 재가제자(在家弟子)들도 절을 짓는 데 마음을 쓰는데, 이는 대법(大法)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라고 수련생이 지적하자, 도리어 사부님께서 이곳에 오시어 어떠어떠하게 하셨다는 말로 그녀들의 집착하는 마음을 덮어 감췄다. 어떤 행위는 이미 수련생의 정상 수련을 아주 엄중하게 교란했고 심지어 대법(大法)의 형식과 대립하면서도 여전히 잘못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한다. 수련생들로 하여금 일체 마음을 내려놓고 법을 배우게 하고, 외지 수련생들을 모두 돌아가게 하라.

어디에서든지 대법(大法)의 수련방식은 개변할 수 없는 것이다. 출가인이 아니면 절대로 출가인을 따라 곳곳으로 다닐 수 없고 더욱이 각 지역 수련생들 속에서 헤집고 다니지 말아야 하며, 또 절을 짓는다는 명의로 수련생들에게 돈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수련생이 절을 짓는 데 돈을 얼마 기증했다고 하여 그들의 수련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반대로 수련과 제고에 전혀 관계가 없으며 생활이 빈곤한 일부 수련생들에게는 오히려 일정한 부담을 조성하여 이로써 수련을 교란할 수 있다. 개인이 어떻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상관하지 않지만, 이는 내가 당신들에게 하라고 한 것이 아니며 수련과는 관계가 없다. 제자들이여, 당신들은 왜 그 유위(有爲)적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가?!

사실, 그녀들이 한 것이 틀렸을 때 나는 줄곧 그녀들을 점화하고 있었다. 단지 그녀들이 집착으로 일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덮어 감추고 정시(正視)하려 하지 않고 또 정시하지 못했을 뿐이다. 법 공부를 할 때도 집착하는 마음을 품고, 집착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유리한 말을 찾아보면서 그 집착을 위한 근거를 찾는다. 이는 법 공부라고 할 수 없으며 수련이라고는 더욱 할 수 없다. 과거에 나는 곳곳을 헤집고 다니지 말고 안심하고 수련하라는 말을 여러 차례 한 적이 있고 또 각 지역 수련생 속에 가서 무슨 설법을 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녀들의 행위가 각 지역에서 모두 반응이 아주 커서 나는 줄곧 그녀들을 관찰하였으며 그녀들 자신에게 깨달을 기회를 남겨주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한번 또 한 번 내가 그녀들에게 준 기회를 밀어냈고, 한번 또 한 번 대법(大法)에 어긋나는 일을 했으며, 스스로 착실하게 수련하지 못하면서 또 수련생을 교란했고, 기회를 한번 또 한 번 잃어버렸으니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하라! 나는 그녀들이 이후 선택할 길을 보고 있는데……. 문제가 있으면 안을 향해 찾는 이것은 대법제자와 속인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李洪志
1999년 3월 3일

 

대법(大法)은 이용당할 수 없다(大法不可被利用)

대법(大法)이 일체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는 위대한 사실은, 삼계(三界)와 삼계 내로 뚫고 들어와 대법(大法)을 파괴하는 그런 이른바 고층(高層) 생명까지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 하나의 문제가 속인 중에서 표현되어 나오게 되는데, 예를 들어 원래 대법(大法)을 반대했거나 혹은 대법(大法)을 믿지 않던 일부 사람마저도 대법(大法)을 배우고 연마하러 온다. 대법(大法)은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나는 그 어떤 사람이든지 와서 배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대법(大法)을 중생에게 전해 준 것이다. 관건은 이런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결코 나를 그(그녀)들의 진정한 사부라고 인정하지 않으며, 대법(大法)을 배우는 목적은 대법(大法)을 이용하여 그(그녀)들 자신이 마음속으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나 종교 중의 무엇을 보호하거나, 혹은 그(그녀)들 마음속의 신(神)을 보호하려는 데 있다. 이것은 법을 훔치는 행위이다. 대법(大法)을 이용하려는 생각 자체가 바로 용서할 수 없는 죄다. 하지만 그들 중의 일부 사람은, 인간의 사상, 이 일면이 그다지 분명하지 않으므로, 나는 줄곧 그(그녀)들을 지켜보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어떤 원인으로 대법(大法)에 들어왔든지 결국 그(그녀)들에게 얻기 힘든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물의 한쪽을 열어 주었는데, 필경 그(그녀)들은 대법(大法)이 널리 전해질 때 태어났고, 또한 사람의 몸을 가졌기 때문이다. 나는 줄곧 그(그녀)들이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다.

실제로 이렇게 들어온 일부 사람은 원래의 인식을 철저히 개변했으며, 대법(大法)을 착실하게 수련하는 견정(堅定)한 제자가 되었다. 반면에 일부 사람, 그(그녀)들은 개변하려하지 않으며, 장기적으로 대법(大法) 중에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세간에서 대법(大法)의 안정을 위해, 나는 그(그녀)들이 계속 이렇게 내려가는 것을 더는 용인(容忍)할 수 없다. 그럼 그(그녀)들은 곧 정말로 기회를 잃게 된다. 내가 말했듯이, 표면적인 개변,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당신이 제도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자신의 마음의 개변과 승화에 달렸다. 마음에서 변화하지 않으면 제고할 수 없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실제로 당신들은 『전법륜』을 봄으로써, 신체 표면상에서 일부 복을 얻은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렇듯 좋지 못한 마음을 품고, 또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여! 잘 생각해 보라! 마땅히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수련하는지? 누구를 위하여 수련하는지? 생명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나는 당신들이 이 이해관계를 바로잡으리라 믿는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들이 잃는 것은 영원히 다시는 있을 수 없다. 대법(大法)이 인류에게 펼쳐질 때 당신들이 잃는 것은 이러한 것만이 아니다.

李洪志
1999년 3월 16일

 

견실(堅實)

불법수련(佛法修煉)은 위대한 것이며, 동시에 또한 엄숙한 것이다. 제자들이여, 당신들은 단지 인간 세상에서만 진짜와 가짜(眞僞)가 있다는 것을 알 뿐, 신(神)을 포함한 다른 공간의 생명은, 층차(層次)가 부동(不同)함으로 인해 알고 있는 일과 진리 역시 부동하여, 우주 중에서 차이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특히 정법(正法) 진상(眞相)에 대해 분명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심한 교란과 저촉(抵觸)이 생겼고, 부동한 방식을 취해 수련생과 접촉하여 파괴한다. 그리하여 일부 저층차(低層次)에서 천목이 열린 수련생에게 대법(大法)에 대해 의문이 생기고 이해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삼계 내의 생명[소위 신(神)]과 고층(高層)공간에서 정법을 도피하여 들어온 이른바 각종 고층(高層)생명, 그(그것)들의 대다수는 정법의 진상을 모르며 정법 자체에 저촉되는 것으로, 그(그것)들 자신의 관념 인식을 수련생에게 전시(展示)하거나 알려주며 혹은 수련생에게 무엇을 전수해 주는 등의 방식으로 대법(大法)에 대한 수련생의 올바른 믿음과 견정(堅定)함을 파괴하고 있다. 사실 모두 아주 낮은 것이며,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인데, 신(神)이기 때문에, 표현되는 것은 아주 온화하고 선하기에 일부 대법(大法) 인식이 부족한 수련생으로 하여금 견정하지 못한 사상이 생기게 하였다. 이리하여,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을 배우지 않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반면으로 나아갔다. 현재 이 문제는 비교적 엄중하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처한 경지 역시 몹시 비참하며, 동시에 그들이 잃는 것은 앞으로 영원히 다시 얻을 수 없다. 이 역시 그들 생명 중의 큰 액운(劫數)이다.

나는 『정진요지』와 『전법륜』 중에서 불이법문(不二法門)과 천목이 열린 다음 어떻게 수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이미 당신들에게 모두 말해 주었다. 왜 그런 위선적인 이른바 고층 생명이 당신들에게 말해주는 것만 보면, 곧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는가? 그(그것)들이 당신을 원만하게 할 수 있는가? 왜 당신들은 생각해 보지 않는가, 당신들이 대법(大法)을 배우기 전에, 그(그것)들은 왜 당신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가? 당신들이 대법(大法)을 배운 후, 왜 그(그것)들은 이렇듯 당신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가? 수련이란 엄숙한 것이다. 나는 대법(大法)의 일체 법리를 모두 당신들에게 말해 주었다. 이 일체는 모두 당신들이 개인수련 중에서 걸어야 할 길이고, 넘어야 할 고비이기도 하다. 넘지 못함은 당신들 자신이 조성한 것인데, 나는 줄곧 당신들에게 기회를 주어 스스로 깨달아 돌아오도록 하였다. 대법(大法)을 위해 나는 더는 기다릴 수 없기에, 이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 나는 당신들이 이 글을 보면, 틀림없이 깜짝 놀라 깨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들이 수련하여 넘어온 것이 아니다. 왜 다른 사람은 교란을 받지 않았는가? 나는 정법(正法)은 삼계 밖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였고, 삼계 내의 일부 이른바 신(神)은 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대법(大法)을 파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법을 바로잡는 일이 삼계와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될 때 그(그것)들은 더는 도피할 곳이 없다. 그러나 그(그것)들의 모든 행위는 다 기록되어 있으며, 동시에 그(그것)들 자신이 장래 자신의 위치를 배치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것은 층차가 떨어지고, 어떤 것은 사람으로 되고, 어떤 것은 음귀(陰鬼)가 되고, 어떤 것은 해놓은 일체를 갚는 중에 거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훼멸 속에서 철저히 멸(滅)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그것)들 자신의 가장 진실한 心性(씬씽) 표현으로 얻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위의 생명 역시 모두 이렇게 대법(大法) 중에서 그들의 위치를 다시 새롭게 배치하고 있는데, 하물며 이러한 것들과 세간의 속인이야 더 말할 게 있겠는가? 법을 바로잡는 중에서 제고되는 이도 있고, 하강(下降)하는 이도 있으며, 훼멸 당하는 이도 있는데, 신(神) 혹은 사람이든 귀신이든 모두 생존에서 전멸(全滅)에 이르기까지 부동한 경지의 매 위치를 새롭게 배치한다. 당신들 사람을 소중히 하는 것은 당신들이 수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에게 그렇게 높은 법리를 말해 주었다. 당신들을 소중히 하는 것은 당신들이 대법(大法) 중에서 정법정각(正法正覺)의 진정 위대한 각자(覺者)로 수련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李洪志
1999년 3월 16일

 

마성을 숙청하다(肅淸魔性)

미국 서부지역 대법(大法) 교류회 이후, 일부 집착심을 품고 법을 들은 사람은 수련이 곧 결속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게다가 스승님께서 일부 사람을 데려가려 하신다고 말했다. 이것은 심하게 대법(大法)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마성(魔性)의 대 폭로이다.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당신이 집착심을 품고 제멋대로 깨달은 것인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원만할 것인지 아는가? 당신은 당신 개인에 대한 집착마저도 내려놓지 못하면서 어찌 원만할 수 있겠는가? 대법(大法)은 엄숙한 것인데, 어찌 사교와 같은 방법일 수 있겠는가. 당신이 아직도 무슨 마성(魔性)이 있다면, 방출(放出)해 보라. 무엇 때문에 기어코 대법(大法)의 대립 면으로 가려고 하는가. 당신이 아직도 나의 제자라면 즉각 마(魔)에게 이용당한 당신의 그 입을 다물라.

제자들이여, 나는 거듭 말했는바 수련은 엄숙하고 신성한 것이며, 동시에 우리들의 수련은 사회에 대해 책임져야 하고, 사람에 대해 책임져야 하며, 또한 자신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무엇 때문에 대범하게 속인사회에 부합하여 수련하지 못하는가! 나는 건의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그 무슨 시간이 없다든지, 자신은 그 무슨 마지막 뒷일을 봐야겠다든지, 스승님께서 어떤 사람을 데리고 간다든지 하는 등등을 말한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은 당장 당신이 조성한 영향을 만회하도록 하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설령 한 마디 말일지라도 마(魔)에게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원만형식(圓滿形式)은 반드시 광명정대한 것이다.

李洪志
1999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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